1. 짧지만 특별한 역사를 지닌 증평
충청북도의 중앙에 위치한 증평은 2003년 군으로 승격되어 이제 15년을 갓 넘은 짧은 역사를 가지고 있으며, 1읍 1면의 행정구역, 3만 7천명의 인구를 가진 전국에서 가장 작은 기초자치단체이다. 증평은 군으로 승격되기 전까지는 괴산군에 속한 읍 단위 행정구역이었으나 지역 주민들의 간절한 바람과 지속적인 요구로 군으로 독립한 ‘특별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
좁은 면적과 작은 인구를 가진 증평이 괴산으로부터 독립하기 위해 내세운 명분은 ‘정체성’과 ‘소외감’이었다. 괴산에서 유일하게 ‘평’이라는 글자를 이름에 넣었을 만큼 너른 평야지대에 위치했던 증평은 험준한 산마을이 많은 괴산의 다른 지역과는 정서적으로 다른 정체성을 가질 수밖에 없었다. 더불어 증평에는 이미 1920년대에 철도역이 생겨 일본인, 중국인을 포함한 많은 외지인들이 들어와 토박이들과 어우러져 살아온 경험 때문인지 인근 다른 지역들보다 상대적으로 개방적인 성향을 지니고 있었다.
그러나 비옥한 평지에 위치한 교통의 요충지 증평은 괴산 안에서는 늘 소외된 외곽 지역일 뿐이었다. 중심지였던 괴산읍에 비해 경제규모가 뒤지진 않았으나 무언가를 얻으려면 늘 ‘투쟁’을 통해서만 가능했다. 증평과 괴산은 다르다는 자각, 오랜 시간의 소외에서 얻어진 훈련된 투쟁력은 증평사람들을 뭉치고 도전하게 했다. 그리하여 ‘계란으로 바위치기’라던 증평군으로의 승격을 이뤄낼 수 있었다.
이러한 증평에 위치한 증평군 기록관은 올해 기록연구사가 1명 더 충원되며 비로소 ‘제대로’ 기록관리를 해볼 수 있는 기반이 만들어졌다. 전국 최소 사이즈의 군 단위 기초자치단체에서 기록연구사를 충원하고 1인 기록관을 탈출하는 ‘특별한’ 전환점을 맞은 것이다. 이는 증평군이 그래왔던 것처럼 ‘투쟁력’을 갈고 닦으며 여러 실험적인 도전들을 해온 결과이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증평군 기록관의 여러 실험들을 소개하고자 한다. 오늘도 홀로 외딴 문서고에서 고군분투하고 있을 전국의 기록인들에게 자그마한 아이디어라도 줄 수 있었으면 하는 바람으로 증평군 기록관의 ‘작지만 위대한’ 사업들을 정리해 보았다.
2. 마을기록 만들기
증평군 기록관의 첫 실험은 마을에서 시작했다.
“마을은 지역의 중요한 사회단위이고 사람들은 마을에서 공동체를 형성하고 일상을 살아가고 있다. 마을사람들은 집단기억과 공유된 문화를 갖고 있으며, 이것을 기록하고 역사를 만들어 내는 경험은 공동체 복원과 지역역량을 높일 수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은 생각에서 예산 확보부터 시작했다. 기록관 자체예산을 도무지 세울 수 없었던 탓에 다른부서 사업 잔액 1천만원을 빌어 1개 마을을 대상으로 사업을 진행했다. 2017년 10월부터 약 5개월간 마을사람들을 직접 만나 옛이야기와 사진을 모으는 작업을 시작으로, 모여진 이야기와 사진을 활용해 마을 이야기집을 발행하였고, 증평군 기록관의 자체 기록관리시스템에 등록하여 증평군의 기록으로 영구보존, 관리될 수 있도록 하였다. 특히 과거의 기억이나 기록들을 모으는 것에 그치지 않고 마을사람들의 사진을 찍어 현재의 기록을 만들어내는 시도도 이루어졌다. 지금의 것들은 미래에는 기록이고, 역사가 될 것이기 때문이다.
사업초반 마을기록 만들기를 이해하지 못하던 마을사람들은 시간이 지날수록 적극적으로 사업에 참여했다. 나와 가족, 우리 마을이 주인공이 되고 추억과 이야기를 공유할 수 있는 경험은 쉽고 즐거운 일이다. 내가 사는 집, 내가 매일 다니는 골목길 앞에서 가족사진을 찍고 마을사람들과 함께 공유하는 경험은 또 하나의 추억을 만들고 평범한 일상에 특별함을 더하는 것이 되었다.
마을기록 만들기 사업을 경험한 사람들은 나와 우리 마을이 특별한 존재라는 것을 인식하기 시작했고, 같은 추억과 기억을 공유한 마을공동체의 소중함을 더 많이 이야기하게 되었다. 그리고 ‘도대체 뭘 하려는지 모르겠어’라며 손사래 치던 사람이 ‘지금 것들을 잘 기록으로 남기면 나중엔 아주 중요한 것이 된다’고 바꿔 말하는 기록전도사가 되는 마법도 목격할 수 있었다.
더욱 신기한 것은 기록관에서 수행한 사업의 산출물이 다른 부서 업무에 활용되기 시작했다는 것이다. 이관된 기록물을 보존하던 수동적 기록관이 적극적인 생산자로 탈바꿈한 것이다.
3. 증평군 경관 아카이빙
증평군 기록관에서는 2017년부터 지역의 경관을 거리와 하늘에서 촬영하여 사진으로 남기려는 장기 계획사업을 진행하고 있다. 계속 같은 자리에서 찍힌 증평의 모습은 5년만 축적되어도 지역의 변화를 확인해 볼 수 있는 중요한 기록이 될 것이다. 2018년부터는 경관 VR영상도 제작하기 시작했다. 처음이 어렵지 첫 발을 떼고 나니 기록관에서 해야 할 일들은 자꾸만 생겨났다.
별다른 감흥없이 지나치던 거리풍경도 높이 띄운 드론에서 촬영한 모습으로 접하면 결코 일상적이 지 않고 특별하게 다가온다. 경관 아카이빙은 특별한 증평을 발견하고 애정을 쌓아가는 작업이다. 경관 아카이빙 기록들이 쌓일수록 증평군 기록관의 지역에 대한 애정도 쌓이고 있다.
4. 기록전시회
2018년 8월에 개최한 기록전시회는 증평군 기록관의 데뷔무대였다. 증평군 또는 증평군 행정과 뒤에 감추어져 있던 기록관을 전면에 내세우고 ‘우리가 하는 일은 이런 것입니다’를 알리는 자리를 마련한 것이다.
전시는 남녀노소 누구나 쉽게 이해할 수 있도록 사진과 영상으로 증평의 과거와 현재를 재현하였고, 정보전달이나 설명을 위한 텍스트는 최소화하여 관람객이 전시에 집중하고 자유로운 상상이 가능하도록 기획하였다.
전시는 작은 기록관에서 추진하기엔 버거운 일이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곳에서 묵묵히 내 할 일을 하겠어’에 만족할 수 없다면 시도해 볼만한 가치는 충분하다. 전시를 통해 지역과 교감하는 경험은 의외로 짜릿할 뿐만 아니라, 전시 준비과정에서 소장기록에 대한 이해도가 높아져 기록관의 전문성도 키울 수 있다.
5. 마을 아카이빙 프로젝트
여러 사업들을 실험적으로 시도해 보면서 ‘증평군 기록관은 지역 아카이브가 되어야겠다’는 목표가 자연스레 생겼다. 이 목표를 이루기에 필요한 자체예산 수립은 역시나 쉽지 않아 2018년 농림축산식품부의 국비공모 사업에 <농촌을 기록해요! 마을 아카이빙 프로젝트>라는 제목으로 도전하였고, 좋은 결과를 얻었다. 증평군 기록관은 올해부터 5년간 20억의 사업비로 지역 아카이빙을 추진하게 된다.
마을 아카이빙 프로젝트는 2019년 기본계획 수립을 시작으로 증평의 사람/마을/단체의 기록을 발굴, 수집하고, 현 시점의 증평기록을 만드는 것을 목표로 한다. 증평군 기록관에서 추진하게 되므로 기존의 다른 주체들이 진행했던 마을만들기 사업과는 차별되는 기록의 보존과 활용을 위한 다양한 사업들도 함께 추진할 계획이다.
아직은 시도된 바 없는 지역 전역에 대한 아카이빙 사업의 결과가 어찌 나올지, 이렇게나 큰 예산을 어떻게 써야할지 걱정도 앞서지만 지금까지 그래왔던 것처럼 증평군 기록관은 ‘도전과 실험’을 멈추지 않을 계획이다. 아직도 기록관리 영역은 척박하다고들 말하지만, 좋은 방향으로 조금씩 나아가고 있는 것도 분명한 사실이다. 증평군과 같은 작은 기초자치단체에서도 아카이빙을 지지해주는 사람들이 늘어나고 있는 실정이니 말이다. 전국 방방곡곡에 작고 실험적인 아카이브들이 생겨나고 ‘협력과 연대’를 통해 ‘작은 아카이브가 모인 큰 아카이브’가 굳건하게 자리잡길 바라는 마음으로 글을 마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