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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P-ISSN 2671-8197
  • E-ISSN 2733-936X

Rumors and Rebellions, a Social Influence of Rumors in the Late Joseon Korea: Focused on the Relevant Cases of the Record of Jeonggam

Korean Studies Quarterly / Korean Studies Quarterly, (P)2671-8197; (E)2733-936X
2012, v.35 no.4, pp.55-85
https://doi.org/10.25024/ksq.35.4.201212.55
koh song-ho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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Abstract

조선 후기 유언비어는 일종의 ‘저항’을 표현하는 수단으로서, 주로 와언(訛言)·요언(妖言)이라는 형태로 표현되었다. 그리고 괘서(掛書)도 유언비어를 유포하는 도구로 이용되었다. 또 ‘거사(擧事) 모의’를 추진하는 과정에서 유언비어는 대민 선동을 위한 강력한 수단이었다. 조선 후기에는 ‘전란’을 주제로 한 유언비어가 자주 유포되었다. 이 과정에서 유언비어를 만들어내는 가장 대표적인 틀은 ‘정감록(鄭鑑錄)’이었다. 정감록은 진인(眞人)의 출현에 의한 왕조교체를 내용으로 하고 있고 나름대로의 이상향에 대한 민중의 희망을 담고 있기도 하다. 또 여기에는 나름대로 전란에 대응하는 방법이 제시되어 있기도 하였다. 그렇기 때문에 유언비어 유포의 주체는 정감록을 통해 민심을 얻고자 하였다. 영조 때 무신란(戊申亂)은 조선 후기 유언비어 사건을 포함한 변란의 정형이다. 무신란 후에는 이른바 ‘무신여당(戊申餘黨)’이 유언비어를 주도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조정에서는 유언비어 등 변란이 발생했을 때 그 주체를 ‘무신여당’으로 지목하였다. 조선 후기, 특히 18세기 이후 유언비어 유포의 주체는 몰락양반, 즉 한유(寒儒)·빈사(貧士)였다. 이들은 나름대로 성리학의 소양을 지니고 있었지만, 정치적으로 뿐만 아니라 경제적으로도 생활 기반을 거의 잃었다. 이들은 성리학의 소양에다 정감록과 같은 민중사상에 해박하였다. 이들은 각지를 떠돌며 훈장, 지관, 의원 등으로 생업을 삼으면서, 정감록 관련 유언비어 등으로 민중의 여론을 선도하였다. 조정에서의 유언비어 사건에 대한 기본 시각은 정감록 사상을 차단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신료들은 정감록 따위를 금할 것을 지속적으로 요청하였고, 국왕에 이에 대해 성리학에 힘쓸 것을 하교하였다. 유언비어는 기본적으로 부정적인 면을 강조하는 말이고, 실제로 사회 전반에 적지 않은 폐해를 남겼다. 그렇지만 조선 후기 유언비어는 민중의 억눌린 감정을 해소해주는 역할을 하기도 하였다. 조선 후기 유언비어 유포의 주체 가운데는 정치·사회·경제적으로 변화와 변혁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정치적으로는 반정을 통하여 새 정치를 지향하려 했고, 사회적으로는 ‘평등’을 주장하기도 하였다. 경제 개혁을 제기하는 경우도 있었다. 조선 후기 유언비어를 포함한 변란 주체의 주장은 비과학적이고 비현실적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의식이 성장하는데 역할을 하였다.

keywords
유언비어(Rumors), 와언(訛言, Misinformation), 괘서(掛書, Posting seditious letters in the public marketplace or on gates), 변란(Political revolt), 무신란(the Musin Rebellion of 1728), 무신여당(the Musin remnants), 정감록[the Record of Jeonggam(a book of prognostications)], Rumors, Misinformation, Posting seditious letters in the public marketplace or on gates, Political revolt, the Musin Rebellion of 1728, the Musin remnants, the Record of Jeonggam(a book of prognostic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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