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rticle Detail

Home > Article Detail
  • P-ISSN 2671-8197
  • E-ISSN 2733-936X

Background in the Spreading of Roof Tiles in Provinces of Late Silla

Korean Studies Quarterly / Korean Studies Quarterly, (P)2671-8197; (E)2733-936X
2015, v.38 no.4, pp.7-37
https://doi.org/10.25024/ksq.38.4.201512.7
LEE Dong-joo
  • Downloaded
  • Viewed

Abstract

『삼국사기』 신라본기 헌강왕 6년조에는 왕의 성덕을 운위하면서 민간에까지 기와와 숯을 사용하는 이야기가 등장한다. 왕경의 태평성대를 다루면서 흔히 회자되는 내용이지만, 기와의 교체주기를 감안하면 이 기사는 와공(瓦工)의 실업상태와 등치된다. 기와는 막대한 연료를 소진하면서 생산이 이루어진다. 그 결과 헌강왕대에는 민간까지 기와가 보편적으로 보급되었다. 수세기 동안 이루어진 소성 작업은 필경 삼림의 황폐화를 초래했을 것으로 생각된다. 이러한 정황은 신라 하대에 조업 중인 기와가마들이 왕경의 외곽으로 서서히 이동하고 있던 상황과도 부합한다. 더구나 숯으로 밥을 짓는다는 사실은 연료의 효율적인 사용으로 비치지만, 이 역시 원거리 이동이 고려된 조치였다고 생각된다. 생활용 목탄인 흑탄은 66%가 타 버리고 나서야 생산되는 것이다. 무게를 가볍게 만들어 먼 거리에서 수송했던 정황이 읽힌다. 신라 하대 왕경 주변에서 기와를 생산하는 여건은 그전과 비교했을 때 상당한 악조건이 형성되었던 것으로 이해된다. 왕경 주변에서 기와가마를 운영하던 장인들은 연료 문제와 수요 부족이라는 현실적인 상황에 봉착하게 된 것이다. 더구나 왕경에 기와건물이 민간까지 운집한 상황에 이르게 되자 이들은 새로운 삶을 구가하려 하고, 사찰이나 지방의 유력 호족에 투탁하여 그들의 거소를 기와로 장엄해주었던 것으로 보인다. 이러한 물적 자료가 바로 왕경에서 사용하던 것과 동범 혹은 유사한 디자인의 기와가 지방에서 등장할 수 있었던 이유이다. 아울러 국외로 눈을 돌린 사람들도 생겨났다. 그들은 일본과 교관업무를 수행하면서 새 삶을 구가하였는데, 모종의 사건에 연루되면서 다시 그들이 체득한 기술을 발휘할 수밖에 없었다.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에 전하는 869년 최악의 동일본 대지진으로 인해 육오국(陸奧國)의 다하성(多賀城)과 부속 사원(寺院), 육오국분사(陸奧國分寺), 육오국분니사(陸奧國分尼寺)가 초토화되자 기와의 수요가 급증하게 된다. 일본에서 교관업무를 수행하던 전직 와공들은 다시금 불려가 기와를 만들게 되는 비운을 겪게 된다. 이러한 상황을 신라 하대 실업상태에 빠진 와공들이 일본으로 건너가 생계를 잇다 벌어진 해프닝으로 보아도 그리 무리한 발상은 아닐 것이다.

keywords
헌강왕, 와공, 실업, 연료, 『일본삼대실록(日本三代實錄)』, King Heongang's, roof tile makers, unemployment, fuel, History of Three Reigns of Japan


Reference

1

昆侖集

2

三國史記

3

三國遺事 ,

4

宣和奉使高麗圖經

5

延喜式

6

日本三代實錄

7

朝鮮王朝實錄

8

국립문화재연구소, 제와장 한국의 중요무형문화재 제91호. 신유문화사, 1996.

9

金有植, 新羅瓦當硏究 . 東國大學校 大學院 美術史學科 博士學位論文, 2010, 61쪽.

10

김성구, 조선시대의 마루기와와 그 특성 . 한국기와학회 제11회 정기학술대회 발표자료집. 2014, 154쪽.

11

김창겸, 「9세기 新羅人의 日本沿岸 출몰과 일본의 대응」. 신라인과 일본 고대사 , 신라사학회, 2012.

12

김호상, 「古代 木炭生産에 대한 考察」. 韓國古代史硏究 26, 2002, 22쪽.

13

김호상·황보은숙, 「신라 왕경지역 출토 고대 목탄요와 관련기록 검토」. 선사와 고대 24권, 2006, 489쪽.

14

노태돈, 「통일기 귀족의 경제기반」. 한국사 3, 국사편찬위원회, 1976.

15

박남수, 신라수공업사연구 . 신서원, 2009.

16

박상진, 역사가 새겨진 나무이야기 . 김영사, 2004.

17

박헌민, 「慶州地域 古新羅‒統一新羅 瓦硏究‒瓦窯의 構造와 出土瓦의 流通을 中心으로」. 기와의 생산과 유통 , 한국기와학회 제8회 정기학술대회 발표요지문,2010.

18

양종현, 「신라기와의 지방확산에 대한 검토」. 문화재 45호, 국립문화재연구소,2012.

19

윌리엄 H. 맥닐 저, 허정 역, 전염병과 인류의 역사 . 한울, 1992.

20

尹善泰, 「新羅 中代末‒下代初의 地方社會와 佛敎信仰結社」. 新羅文化 26, 2005.

21

윤순옥·황상일, 「삼국사기를 통해 본 한국 고대의 자연재해와 가뭄주기」. 대한지리학회지 44권 4호, 2009.

22

이병희, 「朝鮮前期 別瓦窯의 기와 생산과 僧侶」. 靑藍史學 23輯, 2014.

23

李成市 저, 김창석 역, 동아시아의 왕권과 교역 . 청년사, 1999.

24

이정신, 「고려시대 기와 생산체제와 그 변화」. 韓國史學報 29, 2007, 87쪽.

25

전덕재, 한국고대사회경제사 . 태학사, 2006, 336쪽.

26

정순일, 「9세기 후반 큐슈지역의 신라인집단과 그 행방」. 先史와 古代 39호,2013, 295쪽.

27

차순철, 「경주기와의 지방확산과 그 의의」. 신라사학회 제114회 정기발표회 요지문, 2012.

28

최맹식, 「백제 및 통일신라시대 기와문양과 제작기법에 관한 연구」. 호남고고학보 13, 2001, 144쪽.

29

최영희, 「강원의 기와‒조와기술을 통해 본 지방 수공업체계의 형성과 전개」. 강원의 신라, 문화와 역사 , 국립춘천박물관 외, 2013.

30

황상일·윤순옥, 「자연재해와 인위적 환경변화가 통일신라 붕괴에 미친 영향」. 한국지역지리학회지 19권 4호, 2013.

31

吉井秀夫, 「암키와 제작기술의 변천을 통해서 본 9·10세기 한일교류사 연구서설」. 7‒10세기 동아시아 문물교류의 諸像 , 해상왕 장보고 국제공동연구 논문집,2008.

32

東京大學史料編纂所, 大日本古文書 5. 東京: 東京大學出版會, 1998.

33

梶原義實, 「國分寺瓦屋と瓦陶兼業窯」. 日本考古學 19, 2005.

34

山本崇, 「一九七七年以前出土の木簡」. 木簡硏究 30, 2008, 192쪽.

35

森郁夫, 日本の古代瓦 . 東京: 雄山閣, 1991, 156‒157쪽.

36

森郁夫, 瓦 . 東京: 法政大學出版局, 2001, 137‒139쪽.

37

栗原和彦, 「大宰府出土瓦に見られる朝鮮半島統一新羅時代文化の影響」. 九州歷史資料館硏究論集 26, 2001.

38

中村浩, 窯業遺跡入門 . 東京: ニュー·サイエンス社, 1982.

39

進藤秋輝, 「貞觀の大地震と多賀城復興」. 多賀城ロ‒タリクラブ創立40周年記念講演會資料, 2012.

40

국립부여문화재연구소, 實相寺Ⅱ . 學術硏究叢書 第38輯, 2006.

41

慶州大學校博物館, 蔚珍 九山里 傳靑巖寺址 發掘調査報告書 . 學術硏究叢書 第7冊, 2008.

42

嶺南文化財硏究院, 慶州 芳內里 生活遺蹟 . 學術調査報告 第134冊, 2007.

43

聖林文化財硏究院, 慶州 汶山里 靑銅器時代 生活遺蹟 ‒Ⅱ구역‒ . 學術調査報告 第35冊, 2010.

44

聖林文化財硏究院, 慶州 花谷里 生活遺蹟 . 學術調査報告 第73冊, 2012.

45

聖林文化財硏究院, 蔚珍 德川里 統一新羅‒朝鮮時代 生活遺蹟 . 學術調査報告 第90冊, 2014.

46

蔚山文化財硏究院, 蔚山立岩里遺蹟 . 學術調査報告 第78冊, 2010.

47

신라문화유산조사단, 경주의 문화유적ⅩⅡ ‒경주 양월리 463‒6번지 내 유적‒ .2010.

48

韓國文化財保護財團, 浦項 仁德洞 遺蹟 . 學術調査報告 第176冊, 2006.

49

한빛문화재연구원, 「고속국도 제1호선 언양‒영천 확장공사(제4공구) 부지 내 문화유적발굴조사 결과서(5차)」. 2013.

50

忠南大學校 百濟硏究所, 永同 稽山里遺蹟 . 學術硏究叢書 第5輯, 2002.

상단으로 이동

Korean Studies Quarterl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