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738-3188
본 연구는 1990년대 후반부터 2000년대 초반까지 한국 판타지 소설의 정체성 구축 과정을 살펴보고자 했다. 특히, 이 과정에서 행위자들 간의 갈등과 타협이 한국 판타지 장르 정체성 형성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분석했다. 1990년대 후반, 한국 판타지 소설은 PC통신 공간에서 탄생하여 도서대여점을 중심으로 성장했다. 이러한 성장 과정에서 판타지 소설은 제도권 문단과의 갈등을 겪게 된다. 제도권 문단은 판타지 소설을 '환상성'을 매개로 하여 계도 대상으로서 포섭하려 했고, 판타지 소설 작가들은 이에 대항하는 논리를 구축해냈다. 이 과정에서 이루어진 갈등과 타협은 한국 판타지 소설의 최우선 과제로서 한국의 신화와 전통에 기반을 둔 '한국형 판타지'라는 담론을 제시했다. 하지만 소위 '한국형 판타지'는 판타지 소설의 주된 장르적 관습으로 자리 잡지 못했다. 대신 2000년대 이후에는 하이판타지가 아닌 '판무협', '차원이동' 등 다른 장르와의 퓨전 판타지가 주류가 되었다. 이는 제도권 비평이 작품 흥행과 장르적 관습을 선도할 수 있다는 믿음과 괴리되는 결과를 보여준다. 실제로는 작품에 대한 사회적 평가, 흥행 조건, 장르적 재생산 조건이 모두 달랐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외부 행위자와의 접촉에 따른 한국 판타지 소설의 장르 정체성 구축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장르 정체성이 단순히 내부 행위자들의 의도에 따라 형성되는 것이 아니라, 외부 행위자와의 접촉, 사회적, 문화적, 경제적 요인들과의 상호작용 속에서 역동적으로 변화한다는 것을 보여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