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논문은 제주 4.3 사건을 다룬 게임 <언폴디드> 시리즈를 한국 4.3 문학과 비교를 통해 분석하고자 하였다. 한국 4.3 문학의 특징은 국가 폭력을 강조하기 위해 피해자의 ‘순수성’을 부각시키고, ‘현재’에서 4.3을 발견하게 하며, 성장소설의 문법을 따르는 한편, 버내큘러적 요소를 통해 진입장벽을 설정하는 데 있다. 이러한 특징은 4.3의 민중항쟁적 측면이나 반제 자주운동적 측면보다는, 국가폭력과 그로 인한 후유증을 부각시키는 경향을 띤다. <언폴디드: 동백이야기> 역시 ‘순수한 피해자’의 민족적 상징이라 할 수 있는 윤동주를 떠올리게 하는 동주라는 인물을 등장시키고, 성장소설의 문법을 따르며 4.3을 발견하게 한다. 그러나 게임이라는 매체의 특성상, 동주에게 에이전시를 부여하고 그것이 무력화되는 과정을 통해 플레이어에게 4.3의 참상을 더욱 실감하게 만든다. 또한, 게임 내의 버내큘러적 요소는 문학에 비해 상대적으로 약화되어 있는데, 이는 게임 플레이어들에게 역사적 사실을 보다 쉽게 전달하기 위한 방안이라 할 수 있다. 더 나아가 반제 자주운동적 요소나 민중항쟁적 측면을 암시하는 조연 인물들을 도입하여, 4.3을 한국의 4.3 문학에 비해 더 입체적으로 조명하고 있다. 그러나 ‘순수한 피해자’의 순수성과 4.3의 복합성은 게임의 끝까지 승화되지 못하고 파국으로 이어지며, 이는 게임이 아직 결말을 내지 못한 이유와도 연결된다고 볼 수 있다. 이 논문은 4.3을 본격적으로 다룬 게임 <언폴디드> 시리즈를 분석하고, 이를 기존의 4.3 한국 문학과 비교하여 그 의의와 한계를 밝혔다는 점에서 의미가 있다.
한국 SF가 ‘80년 광주’를 이야기한 사례는 손에 꼽을 숫자밖에 되지 않는다. 하지만 ‘80년 광주 SF’는 1980년 이래 정치 사회 변동의 중요 국면마다 확인된다는 점에서 결정적이다. 이 연구의 문제의식은 크게 세 가지다. ① ‘5・18’을 ‘SF’와 연결하는 상상력은 사회 구조의 변동과 어떻게 연결되며 발현하는가? 이를 위해 잠재적 창작 역량으로서의 ‘5・18 상상력’의 형성 추이를 추적한다. ② ‘5・18이 소거된 광주’를 상상하는 서사는 왜 기피되거나 시도하더라도 정치적 오염에서 벗어날 수 없는가? ③ ‘80년 광주’를 이야기하는 SF는 임철우, 윤정모, 홍희담 등의 이른바 非 SF 문학과 어떤 차이가 있는가? 대상으로 삼은 소설은 채영주의〈시간 속의 도적〉(1993), 김세랑의〈ARMOR’S STORY〉(1993)와 강유한의〈리턴1979〉(2009-2011), 김희선의 〈무한의 책〉(2017)이다. 1979년 12・12 사태로부터 1980년 5・18, ‘5・18’을 둘러싼 용어 변천사, 84년 유화 국면 이래의 학술 출판계의 대응, 6월항쟁과 직선제 개헌, 정권별 5・18과 통일에 대한 정책 변화, 1993년 문민정부의 탄생과 하나회 축출, 역사바로세우기 정책, 세기말에서 밀레니엄 시기의 5・18을 둘러싼 각종 논쟁 등을 추세선(趨勢線)으로 인식하고 ‘80년 광주 SF’의 발생이라는 결과에 이르는 역사의 추세를 역산(逆算)하는 ‘외삽법(Extrapolation)’을 본 연구의 방법론으로 삼았다. 시기별로 그 흐름을 소략하면, ‘5・18’을 ‘SF’와 연결하는 상상력은 1980년대 한국에선 불가능했다. 전환점이라 할 수 있었던 것은 1993년이었다. 1993년 3월에 채영주의 〈시간 속의 도적〉, 1993년 〈취미가〉 3월호와 4월호에 김세랑의 〈ARMOR’S STORY〉가 발표됐다. 국민의 정부와 참여정부 시기를 지나는 동안에는 ‘80년 광주’와 ‘SF’의 접목은 눈에 띌 만한 성과가 적었다. 오히려 이명박 정권과 박근혜 정권 시기에 역설적인 활기를 되찾는다. ‘5・18 상상력’을 우익의 관점에서 갱신하는 강유한의 대체 역사소설 〈리턴1979〉가 이 시기(2007-2011)에 연재됐다. 촛불 항쟁으로 박근혜 대통령이 탄핵당하고 문재인 정부가 들어선 첫해인 2017년에는 김희선의 〈무한의 책〉이 발표된다. 각각의 작품을 잇는 흐름을 통해 ‘5・18 상상력’을 반드시 포함해야 하는 사실과 해석, 정서들의 나열 속에 맴돌게 하지 않을 ‘사이’, 국가의 영역이나 제도화된 학계의 영역에 분류되지 않을 때 가능한 ‘사이’를 사유하는 SF의 발견으로 접근하고자 한다.
본 연구는 가상개체를 활용한 유튜브 콘텐츠에서 나타나는 서사 전략을 디지털 참여 관찰과 텍스트 분석을 결합하여 고찰하였다. 가상개체를 활용한 디지털 스토리텔링 콘텐츠가 지속적으로 만들어지는 환경에서 기술적 참신성이 대중적 영향력을 담보하지 않는다는 문제의식하에 참여문화를 통해 영향력을 확보해온 마인크래프트 기반 크리에이터 콘텐츠에 주목했다. 분석 결과, 크리에이터들은 메타버스 플랫폼과 스트리밍 플랫폼을 다중으로 활용하며 상호작용에 기반을 둔 ‘커뮤니티 중심 스토리텔링’ 전략을 구사하고 있었다. 마인크래프트가 제공하는 가상환경과 아바타를 활용해 서사의 배경 표현의 다양성을 확보하였으며, 크리에이터의 페르소나를 변주함으로써 이야기의 단조로움을 피하고 예측불가능한 전개를 만들어내고 있었다. 이때 이야기를 이끌어나가는 크리에이터의 페르소나는 3D 아바타의 외양 및 동작, 게임월드가 부여한 사회적 역할, 인물 간 관계에서 발생하는 사건 등 메타버스 플랫폼 내외부 요소가 결합되면서 복합적으로 형성되고 있었다. 결론적으로 특정한 플랫폼을 단일하게 이용하는 것이 아닌, 메타버스 플랫폼과 스트리밍 플랫폼을 가로지르는 상호작용이 콘텐츠 제작에 핵심적인 요소로 기능하고 있었다. 메타버스 월드와 복수의 스트리머/플레이어 간 상호작용, 시청자와의 상호작용 등 중층적인 상호작용 양상이 관찰됨에 따라 개별플랫폼 활용양상을 넘어선 교차 플랫폼 활용에 대한 학술적 논의의 중요성을 강조하고자 한다.
버추얼 아이돌이 문학에 등장하면서 팬픽에서 요구되었던 욕망의 차원을 넘어 아이돌 팬덤과 팬들의 현실적인 인식을 간접적으로나마 살펴볼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최근 인기몰이 중인 버추얼 아이돌의 존재와 팬덤 차체를 이해하기 어려운 사람들도 있을 것이다. 이를 위해 본 연구는 문학 작품을 통해 버추얼 팬덤 문화와 변화된 사랑관을 검토하는 데 목적을 둔다. 메타버스의 확장과 인공지능 발달로 수혜를 입은 버추얼 아이돌은 아이돌 문화와 팬덤 문화를 변화시켰다. 이들은 언제나 접할 수 있는 연속성을 지녔고, 팬들을 불안하게 하지 않을 절대적 믿음을 제공한다. 이는 버추얼 아이돌뿐 아니라 버추얼 휴먼에 대한 긍정적 인식으로 이어진다. 본 연구에서는 버추얼 아이돌과 기존 아이돌 팬덤의 다양한 인식의 변화 중 사랑에 주목한다. 팬들의 사랑을 갈구하는 아이돌과 사랑을 증명하고 싶은 팬들의 관계를 문학으로 보면서 아이돌과 버추얼 문화를 살핀다. 나아가 실체가 존재하지만 지나치게 이상적인 기존 아이돌에 대한 사랑과 가상이지만 지극히 현실적으로 사랑을 주는 버추얼 아이돌의 사랑을 비교할 수 있다. 기존 아이돌이 일방향적인 사랑을 필요로 했다면, 버추얼 아이돌은 팬과 언제나 소통가능한 완전한 사랑을 구현한다. 일방향적인 사랑에 지친 <사랑 파먹기> 속 인물들은 버추얼 아이돌을 쫓게 되면서 완전한 사랑을 느낀다. 이들에게 사랑은 불완전하고, 불편한 것이었다면 버추얼 아이돌로 인해 완전한 사랑의 가능성을 찾았던 것이다. 이러한 서사를 바탕으로 2장에서는 완전무결한 특성을 가지는 버추얼 아이돌과 인물들의 변화된 인식을 검토한다. 3장에서는 아이돌 팬덤의 사랑관에 집중하여 파편화된 기존 아이돌을 향한 팬들의 사랑관과 신적인 사랑의 형태인 완전한 사랑을 제공하는 버추얼 아이돌을 비교하며 인물의 시선을 따라가 보자.
영화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흥행에 성공하면서 동시대 대중들의 호응을 받았고, 포스트 아포칼립스 영화 장르의 흥행 가능성을 보여주었다. 본 논문은 <콘크리트 유토피아>가 형상화한 디스토피아의 ‘미래’는 무엇을 의미하는지를 살펴본다.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장르, 서사 시간, 영화 장치의 배치 속에서 기괴한 유토피아의 문화 정치학을 보여준다. 이는 크게 스크린 미디어의 시간성, 아이의 상징적 시간성, 그리고 플래시백의 시간성 등 세 가지 시간성을 중심으로 한다. 각각의 시간은 현재/근미래, 다큐멘터리/SF가 구분 불가능한 스크린 미디어의 시간, 미래의 상징인 아이의 부재, 되돌아가고 싶은 과거가 부재한 플래시백으로 나뉘며 이는 각각 현재, 미래, 과거를 나타낸다. 아파트의 역사를 시작으로 멸망한 현재를 보여주는 스크린 미디어는 ‘아파트’를 향한 물신의 영속성을 보여준다. 멸망한 현재에서 재생산의 미래를 상징하는 아이는 부재하다.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의 관습과 같은 ‘아이의 구원’의 자리를 <콘크리트 유토피아>는 저출산이라는 실재로 봉합하면서 장기적인 미래를 상상하는 것의 불가능성을 기호화한다. 아이의 상징성만이 아니라 플래시백의 관습 또한 ‘아파트’를 향한 욕망의 지속을 강화한다. 자본주의가 상상된 미래라는 허구적 구성을 전제로 작동하는 시스템이라면, ‘아파트’를 향한 욕망 자체가 한국 자본주의를 추동시키는 허구적 구성물이라 할 수 있다. 본 논문은 현재 대중들의 호응을 얻고 있는 포스트 아포칼립스 장르 영상물의 감응 구조를 밝히고, 지금 여기에서의 ‘미래’에 대한 영화적 표현을 분석하는 데 의의가 있을 것이다.
이 글에서는 게임판타지에 나타난 성과주체가 왜 자발적으로 노가다 플레이를 지속하는지 게임적 요소, 판타지적 요소, 웹소설적 요소의 층위로 나누어 살펴보자고 한다. 그리하여 게임판타지에 드러나는 성과주체는 과연 자본주의 이데올로기에 복무하는 것으로 궁극적 의미를 다하는 것인지, 또 다른 균열과 저항을 드러낼 수 있는 대항주체로 기능할 수 있는지 알아보고자 한다. 게임판타지에서 성과주체는 자발적으로, 열정적으로 노가다 플레이를 지속한다. 선명한 목표와 명료한 절차가 있는 행복한 생산성, 아이템 획득과 레벨업이라는 성공(성장)을 경험한 기쁨, 사회적으로 연결되어 있는 소속감과 안정감, 의미있는 일을 하고 있다는 장대함을 게임 감각으로, 일상 감각으로 맛보는 성과주체는 리얼리티를 딛고 판타지를 품은 이중 현실 가운데 열광적으로 노가다 플레이를 지속한다. 게임판타지는 이 행복의 묘미를 ‘상태창status, 퀘스트quest, 레벨업level-up이라는 게임적 요소와 현실세계와 가상세계의 세계관 중첩overlap이라는 판타지적 요소’로 재현했다. 또한 한 화(話)라는 짧은 호흡에서 ‘위기-해소-위기’의 사이다 구간을 진행하기 위해 성실한 먼치킨 주인공이 탄생했다. 먼치킨 주인공은 놀랍도록 성실함과 선량함을 보여주는데, 이는 독자들의 기대와 욕망에 부응한 것이다. 성실하고 선량한 인물이 노력 끝에 레벨업을 하면서 승리를 거두면 독자는 대리만족하게 된다. 게임판타지의 주인공들은 수많은 서사와 함의를 지니고 있다. 그들은 자본의 환상에만 사로잡혀 있지 않다. 그들 역시 놀이노동으로 착취됨을 인지한다. 그들은 제국의 힘 없이, 다중의 힘으로 놀이노동을 가장자리에서 균열을 내면서, 또 다른 콘텐츠로 변주하면서 송출할 준비를 한다. 이 글은 게임판타지의 장르관습을 분명하게 규명하면서, 성과주체가 균열과 저항을 드러낼 수 있는 대항주체로 기능할 잠재력을 발견한 데 연구 의의를 지닌다.
이 논문은 넷플릭스 오리지널 드라마 <삼체>가 동명의 원작 소설을 성공적으로 재창조했다는 관점에서 그 변주 방식과 주제적 의미, 파생 효과에 대해 논구한 글이다. 먼저 <삼체>는 방대한 시공간에 산포되어있던 원작의 인물들을 현재 상호 관련되는 인물들로 재편한다. 이 과정에서 캐릭터는 정형화되고 구성은 단순명료해지며 갈등 구도는 인류와 외계인, 우리와 타자라는 이분법적 대립 구도로 재구성된다. 이는 복잡한 원작의 이야기에 대한 진입 장벽을 낮추고 시청자의 이해도를 높이고자 하는 대중 친화적 시도라 할 수 있다. 이러한 각색 방향성에 따라 주제적 의미 또한 원작과 달라진다. 먼저 정치적 측면에서는 국가/조직보다 개인을 강조함으로써 원작에서 제기되었었던 현실의 중국 관련 논란을 피해간다. 다음 윤리적 측면에서는 모성, 사랑, 희생과 같은 도덕 윤리를 서사의 원동력으로 삼아 그 필요성과 중요성을 다시금 강조한다. 정치성을 약화시키는 대신 전통적 윤리를 부각하는 이러한 변화는 다양한 가치관을 지닌 전 세계 시청자에게 보편적으로 소구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으로 읽힌다. 하지만 <삼체>의 이러한 서사 전략은 다른 측면에서 재론될 수도 있다. 캐릭터 재편 과정에서는 문화적 다양성을 지향하는 시도가 이뤄졌지만 그 속에는 서구 중심 세계 질서를 회복하려는 욕망이 존재하고 있다. 또한 과학기술의 이상적 측면이 부각되면서 인간성에 대한 천착보다 근대적 진보주의 세계관이 두드러진다. 이러한 <삼체>의 서구 중심적 기획은 글로벌 콘텐츠의 본질적 속성과 관련해 향후 지속적인 연구가 필요하다고 판단된다.
이 논문은 영화 <프로메테우스>를 통해 인간강화(human enhancement)에 대한 욕망과 그로 인한 역설을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에이리언> 시리즈의 프리퀄 가운데 첫 작품인 이 영화는 엔지니어와 인간, 인간과 안드로이드, 그리고 안드로이드와 엔지니어 사이의 창조-피조 관계를 통해 인간강화를 향한 욕망과 그 이면에 놓인 인간성의 문제에 대한 새로운 질문을 던진다. 웨이랜드는 죽음이라는 인간의 한계를 극복하려는 첫 시도로 인조인간 데이빗을 창조한다. 데이빗은 인간처럼 행동하고 감정을 모방하지만, 인간을 초월하려는 욕망을 지니고 있다. 그는 인간의 유전 정보를 이용해 새로운 생명체를 창조하는데, 이는 인간강화가 불러올 수 있는 가장 이질적이고 파괴적인 형태의 ‘트랜스휴먼’인 제노모프를 탄생시킴으로써 그 욕망에 내재한 위험성을 보여주려 한다. 영화는 창조자와 피조물 사이의 복잡한 관계를 탐구하며, 인간이 자신의 한계를 뛰어넘으려는 시도가 오히려 인간의 본질을 위협할 수 있음을 경고한다.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강화에 대한 질문을 던지며, 기술적 진보가 인간 존재의 본질을 어떻게 변화시키는지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제시한다. 영화는 인간강화가 단순히 능력을 향상시키는 것을 넘어, 인간이 자신의 취약성을 극복해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를 묻는다. 이는 인간의 존재와 정체성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으로, 인간강화가 불러올 미래에 대한 경고와도 연결된다. 영화는 인간강화의 결과로 탄생한 제노모프를 통해, 인간의 욕망이 초래할 수 있는 파괴적 결과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며, 이러한 욕망이 인간을 더욱 이질적이고 파괴적인 존재로 만들 수 있음을 암시한다. 결국 <프로메테우스>는 인간강화의 끝이 단순한 기술적 진보가 아니라 인간 존재의 근본적인 변화를 초래할 수 있음을 경고하며, 강화의 목적과 그 이유를 끊임없이 탐구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전달한다.
2020년대에 이르러 현대로맨스 장르의 웹소설 중 ‘불륜 복수물’이 인기를 끌고 있다. 그런데 대부분 자극적 흥미를 지향하면서 기존 막장 드라마의 설정과 연관된다. 이 연구의 목적은 불륜과 복수의 모티프가 포함된 <내 남편과 결혼해줘>와 <못 잡아먹어서 안달>이 로맨스 장르의 전형화된 스토리텔링에서 벗어나, 서사의 변화 양상이 나타남을 분석하는 것이다. 먼저, <멜팅 슬로우>와 <완벽한 결혼의 정석>을 중심으로 ‘상처녀’, ‘계약결혼’, ‘경쟁’ 클리셰를 살펴보았다. 이 세 클리셰는 인물의 관계 등 형상화에 차이는 있으나, 불륜과 복수를 다룬 현대로맨스 장르에서 광범위하게 나타난다. 가족에게 학대 받던 여주인공은 남편(애인)의 불륜을 알게 되면서 재벌가의 남성에게 계약결혼을 제안하고, 이는 복수를 성공시키는 수단이 된다. 그리고 불륜과 연결된 형제자매 간 경쟁 속에서 친자 확인, 살인과 음모 등의 소재가 부각되며, 남녀주인공은 ‘낭만적 사랑’의 형태로 서로가 구원된다. 한편, <내 남편과 결혼해줘>(성소작)에서 여주인공은 자신의 운명을 바꾸면서 피해를 당하는 인물이 생겨남을 깨닫고 ‘회귀자’의 윤리를 고민한다. 이 소설은 남녀주인공의 결혼과 임신을 통한 해피엔딩은 고수된다. 그러나 여주인공이 능동적으로 복수하는 과정이 부각되면서 여주인공과 조력자 간의 유대가 더욱 중요하게 형상화된다. 또한 <못 잡아먹어서 안달>(플아다)은 일반적인 불륜 복수물의 클리셰를 따르지 않는 작품이다. 여주인공이 애인의 배신을 복수로 대응하지 않기 때문에 여주인공과 내연녀의 경쟁이 부재한다. 그리고 여주인공이 로맨스의 의미를 재인식하고, 자신이 원하는 바를 탐색하는 성장 과정이 서사화되면서 로맨스가 지연된다. 성소작과 플아다의 작품은 재벌가 남성과의 결혼, 권선징악에 입각한 사이다 복수물이라는 전형성은 존재한다. 그러나 ‘계약결혼’이 사라지고, 여주인공-내연녀의 경쟁 클리셰를 비틀면서 로맨스의 형상화가 달라진다. 이 연구는 낭만적 사랑을 지향하는 서사를 부분적으로 비켜가면서 새로운 스토리텔링 양상이 나타난 로맨스물을 세밀하게 분석했다는 의미가 있다.
본 논문은 비판적 노년학의 관점에서 오늘날 노인의 존재론적 위상을 연구하였다. 현재 노년학의 주된 흐름은 ‘성공적인 노화’에 있다. 과학기술과 결합한 항노화 산업은 현재 가장 각광받는 분야이다. 기존의 노화 정책은 노인을 수동적인 존재로 구성한다. 그들은 관리와 통제의 대상으로 전락할 뿐만 아니라 무능력한 잉여적 존재로 전락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는 대표적인 예가 애니메이션메이션 <노인Z>와 영화 <나, 다니엘 블레이크>이다. 여기서 노인들은 복지 시스템의 부속물이 되거나 신자유주의 정책의 희생자로 등장한다. 노인 복지의 주요 이론인 생애주기는 제품의 수명주기와 다르지 않다. 게다가 상품의 계획적 진부화의 논리처럼 노년은 폐기되어야 할 존재로 구성되고 있다. 탈정치적 생명정치 속에서 노인은 관용의 이름으로 폭력에 노출되고 있다. 노인의 고립과 유폐는 차이의 인정이라는 이름으로 정당화되고 있다. 요양원은 연성화된 감금기관에 다름 아니다. 게다가 코로나 팬데믹 사태에서 보았듯 ‘예외 상태’ 속에서 노인들은 언제든지 폐기할 수 있는 존재, 즉 정치적, 법적으로 배제된 호모 사케르가 될 수 있는 것이다. 안티에이징을 신비화하고 숭배하는 사회 속에서 온전한 ‘늙음’은 불가능하다. 요컨대 늙음 없는 늙음, 노인 없는 노인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늙음을 적으로 규정하는 사회에서 ‘늙음’과 ‘노인’의 존재에 대한 진지한 사유는 불가능하다. 무엇보다 우리는 노인들의 겪는 진정한 고통을 응시할 수 있어야 한다. 이 용기는 노인과 사회를 위한 새로운 언어(담론)의 발명으로 이어져야 하며, 이는 다양한 학문 간의 통합 과정을 통해 비로소 형태를 갖춰갈 수 있을 것이다.
본 논문은 최근 연이어 방영된 텔레비전 드라마 〈혼례대첩〉, 〈열녀박씨 계약결혼뎐〉, 〈밤에 피는 꽃〉을 대상으로 열녀/과부 서사가 열 이데올로기를 담아내는 방식을 분석하고 그에 내포된 동시대적 메시지를 살피고자 한다. 여성의 성(性)에 대한 의미와 해석은 사회적 맥락에 따라 구성되며 사회 유지의 방편으로 활용되었다. 본 연구에서 주목하는 열녀/과부 서사는 텔레비전 드라마라는 현대적 매체를 통해 재해석되면서 동시대 시청자들의 문제의식과 선호도를 반영하게 되었다. 이에 텔레비전 드라마의 열녀/과부 이야기에는 서사적・매체적 차원을 포괄하는 종합적 접근이 요구된다. 세 드라마는 조선 과부들에게 가해지는 전근대적 열 이데올로기의 폭력성을 직접 담아낸다. 하지만 열 담론을 조명하는 것에 그치지 않고 재해석을 시도함으로써 경력 단절 여성, 돌싱, 비혼 등 동시대의 사회 현상을 다루기에 열녀/과부 서사의 새로운 매체를 통한 판본(板本)이라 할 수 있다. 수절과부라는 설정은 이타적 사랑을 강조하는 장치로 활용되며, 과거에는 결코 현실화할 수 없었던 과부의 해방과 자아실현은 21세기의 판본에서만 가능한 서사 내부의 성취이다. 그러나 상업성을 고려할 수밖에 없는 매체적 특성은 제도의 폭력성을 간과하는 한계도 불러온다. 남편에 대한 의리를 지키겠다고 하는 것은 자신의 선택이었을지 모르나, 그에 따라오는 감금 생활과 종사 요구는 분명 제도적 폭력이다. 세 드라마 모두 로맨스를 활용해 여성들이 사회적 억압을 풀어나가는 방식을 낭만화한다는 점도 주목할 만하다. 과부의 해방은 법과 권력에 기대어 의도적으로 설정된 절대 악을 제거하는 방식으로 이루어진다. 이러한 드라마 속 열녀/과부들의 판타지적인 결말은 전근대 열 이데올로기의 문제를 가볍게 만드는 동시에, 동시대적 현실이 직면한 사회 문제도 ‘진정한 사랑’만 있으면 극복할 수 있는 것으로 만들어버린다. 열 담론의 새로운 판본으로서의 텔레비전 드라마들은 과거와 현재의 사회적 문제를 행복한 결말로 미봉하며 여전히 여성 주체를 소외시킨다.
가네시로 가즈키의 소설 <GO>는 기존 재일한국인 문학에서 반복되었던 민족 차별과 문화적 차이를 넘어선 독창적인 서사와 탈식민적 의식을 보여준다. 본 연구의 목적은 주인공이 국가와 민족이라는 억압적 구조에서 벗어나 초국가적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글쓰기 방식과 함께 분석하는 것이다. 이를 통해 탈식민적 사고방식과 개인의 정체성 형성 문제를 논의하고자 한다. 본고는 우선, 주인공이 ‘연결고리 끊기(de-linking)’를 통해 기존 민족 및 국가적 억압에서 해방되어 인식 주체로 성장하는 과정을 탐구한다. 주인공이 국가 정체성에 대해 고민하며, 편견의 원인과 역사적 맥락을 공부하고, 다양한 마이너리티들과 그 지식을 공유하며 저항 담론을 만들어가는 지적 궤적을 살펴본다. 이를 통해 주인공이 국가에 얽매이지 않고 주체적인 삶을 살아가는 과정을 분석한다. 이 과정에서 주인공은 다양한 마이너리티 집단과의 연대를 통해 새로운 정체성을 형성하며, 주체적인 삶을 선택하게 된다. 본 논문에서 다룰 소설은 대중영화화된 <GO>와 달리, “선택”과 자신의 역사와 사회, 편견에 대한 “앎”이 중요한 주제로 등장한다. 민족적 정체성을 찾아가는 과정에서의 선택과 앎은 탈식민주의에서 논의하는 탈식민적 선택과 지식과도 맞닿아 있다. 본 연구는 <GO>가 단순히 재일한국인 문학의 범주를 넘어, 탈식민적 사고를 바탕으로 새로운 서사 방식을 제시하는 작품임을 밝히고, 그 가치를 평가한다. 이 작품은 기존 재일한국인 문학에서 다루었던 민족적 서사를 넘어, 일본 사회에서 대중성을 획득한 사례이다.
이 연구는 최근 주목받고 있는 이민자 서사에서 공통적으로 세대 간 문화적 돌봄이 나타난다고 보고, 이를 기제로 텍스트를 분석하여 ‘돌봄’이 중요한 키워드가 되고 있는 현대 사회에 주는 의미를 도출하고자 하였다. 이를 통해 대중서사가 제시한 새로운 시대에 요청되는 돌봄 양상의 청사진을 명료하게 하는 데 목적이 있다. 대상 작품들은 해외에 정착한 한인 가족 중에서도 해외에서 태어난 이민 3세대가 주인공으로 등장한다. 그들에게는 낯선 한국 문화를 가진 할머니를 만나 서로 돌봄을 주고받는 모습을 그리고 있다. 특히 조손(祖孫) 관계와 서로 다른 문화라는 환경에서 기인하는 세대-문화 즉, 종적-횡적 교차가 인물들이 주고받는 돌봄의 의미를 보다 풍성하게 구현하고 있다. <미나리>의 순자와 <호랑이>의 애자가 이민 3세대의 손자들에게 행하는 돌봄의 양상을 살펴보면 자신이 경험한 한국의 전통 문화만을 강조하거나, 그들 세대의 가치관을 주입하는 일방향으로 이루어지는 돌봄이 아니었다. 피돌봄자인 손자에게 전념하며 그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면서 ‘너는 강한 아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하고 있는 것이다. 이를 통해 피돌봄자는 자아 정체성을 확립하고 돌봄을 행할 수 있는 존재로 성장하며 상호 돌봄의 관계를 형성하게 된다. 피돌봄자가 돌봄을 수용할 때 비로소 돌봄 관계가 완성됨을 이야기하는 나딩스의 돌봄 윤리를 바탕으로 이 연구에서 살피고자 하는 돌봄자와 피돌봄자는 수용을 통해 상호 돌봄으로 나아가 연대의 주체가 된다. 최근의 돌봄 논의는 가정의 영역을 넘어서 사회적・제도적 차원에서 활발하게 이루어지고 있다. 하지만 ‘필요’를 기반으로 하는 제도적 차원의 돌봄과 함께 타자의 존재를 수용하고 진정한 마음을 건네는 돌봄 역시 빼놓을 수 없는 중요한 가치를 지닌다. 이런 현실에서 문화와 세대의 간극을 메워 서로 돌봄을 주고받는 이민자 서사를 살펴봄으로써 진정한 ‘돌봄’의 방향성을 탐색하는데 시사점을 제공한다.
본 연구는 ‘마인드 업로딩Mind-Uploading’ 기술에 대한 SF영화의 서사를 분석함으로써 동시대 영화의 SF적 상상력이 제기하는 인식론적이고 존재론적인 사유가 갖는 의의와 한계를 살피고자 한다. 그리고 그로부터 죽음에 대한 포스트휴먼적 윤리의 필요성을 제기하며 SF가 이를 논의하는 대안적이고 담론적인 장이 될 수 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SF의 주된 소재 중 하나인 마인드 업로딩 기술은 인간 존재를 기억이라는 정보로 환원한다는 점에서 신체의 문제뿐만 아니라 죽음과 관계의 문제와도 깊이 관련되어 왔다. 2020년대 한국 영화계에서도 SF영화에 대한 관심과 기대가 높아졌고 그만큼 새로운 기술을 적극적으로 활용하여 미래 기술과 사회를 사유하는 작품이 등장하게 되었다. <마인드 유니버스Mind Universe>(2023)와 <원더랜드(Wonderland)>(2024)는 공통적으로 마인드 업로딩 기술을 활용하여 디지털 사후세계를 구축하는 미래 사회가 죽음을 다루고 애도하는 방식을 상상한다. <마인드 유니버스>는 정보화된 기억이 갖는 물성을 죽은 이의 기억을 토대로 구성된 AI와의 접촉을 통하여 드러내고, 사후적으로라도 존재와 시공간을 재구성하면서 애도를 완성하고자 하는 남겨진 이들의 욕망을 담아낸다. 반면 <원더랜드>는 죽은 이의 기억을 토대로 구성된 AI가 살아가는 가상세계를 구축함으로써 죽음을 넘어서는 사랑을 그리고자 한다. 그러나 죽음을 자본화하고 상실의 자각을 불가능하게 만드는 서사는 역으로 애도를 박탈시키는 생명정치적 미래를 상기시키고 있다. 두 작품의 서사와 주제를 살펴볼 때, 한국 영화계의 SF적 상상력에는 화려한 연출이나 기술적 요소 외에도 서사적인 차원에서 가족, 사랑, 관계, 그리고 죽음에 대한 대안적 사유를 충분히 제공하는가에 대한 성찰과 죽음에 대한 윤리적 고찰이 요청된다. 아울러 SF영화가 갖는 인식론적인 잠재성을 효과적으로 실현하기 위하여 대안세계를 모색하는 담론 장으로서의 SF의 의의를 지속적으로 되짚어야 할 것이다.
이 글에서는 아카이브로서 하위주체 읽기를 시도한 소영현의 『하녀-빈곤과 낙인의 사회사』(2024)에 주목하며, 사이디야 하트만(Saidiya Hartman)의 글들을 소영현의 『하녀』와 겹쳐 읽어보고자 한다. 하트만은 현대 사회에 잔존 중인 노예제의 인종 차별적 폭력을 ‘노예제의 사후세계(the afterlife of slavery)’로 개념화하며, 흑인 여성들이 겪는 차별과 폭력이 아카이브에서 어떻게 다루어지고 있는지를 분석했다. 소영현은 한국 사회에서 하녀의 목소리를 들을 수 없게 된 역사적인 경위를 추적하며 아카이브 다시 읽기를 시도했다. 아카이브가 전하는 공식 기록 너머의 억압된 목소리를 듣기 위한 방법을 적극적으로 모색하며, 하위주체들의 서사를 재구성하는 새로운 역사 쓰기의 가능성을 제시한다는 점에서 소영현과 하트만의 연구는 공통적이다. 하트만은 흑인 노예제 아카이브를 어떻게 읽어낼 것인가를 질문하며, 아카이브로부터 무엇을 이야기할 수 있고 동시에 무엇을 이야기할 수 없는지에 대해 사유해왔다. 소영현은 지금까지 한국 사회에서 하녀의 존재를 보지 못하고 그들이 보이지 않는 존재로 인식되어 온 이유는 하녀의 삶을 읽는 방법을 제대로 생각해보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진단한다. 아카이브를 다시 읽는 행위는 한국 사회에서 비가시적인 존재로 내몰린 타자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갈 것인가를 성찰하는 윤리적 실천의 일환으로 평가될 수 있을 것이다.
In this article, I focus on Young-Hyun So’s The Housemaid: A Social History of Poverty and Stigma (2024), which interprets subjects as archives and intersects with Saidiya Hartman’s work. Saidiya Hartman conceptualizes the racial violence that persists in modern society as the "the afterlife of slavery," analyzing how the discrimination and violence experienced by Black women are treated within the archive. Similarly, Young-Hyun So traces the historical trajectory of how the voices of female domestic workers have been silenced in Korean society and conducts research that seeks to uncover the truth conveyed by the archive. Both Hartman and So share a common focus on exploring ways to actively listen to the repressed voices beyond the official records of the archive, proposing the possibility of a new historiography that reconstructs the narratives of marginalized subjects. Hartman has long been preoccupied with the question of how to interpret the archives of Black slavery, focusing on what can and cannot be told from the archive. So diagnoses that the reason why domestic workers have remained invisible and unacknowledged in Korean society is due to the lack of consideration given to how their lives are read. The act of rereading the archive can be viewed as an ethical practice that reflects on how we might live together with the marginalized others who have been rendered invisible in Korean societ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