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 연구에서는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에 걸쳐 이루어진 무협소설의 변천사를 매체의 변화와 함께 살피고자 한다. 1990년대부터 2000년대 중반에 걸쳐 이루어진 매체의 급격한 전환 및 출판 시장의 변화는 일반적으로 말하는 장르소설을 크게 변화시켰다. 1960년대부터 한국의 대중장르서사의 큰 축이었던 무협소설은 오래된 만큼 많은 부침을 겪었다. 그중에서 가장 눈에 뜨이는 변화는 2000년대 초반에 있었던 연재 체제의 변화다. 이러한 문제는 매체의 변화와 맞물리는 측면이 있으며, 그것이 1990년대 중반부터 2000년대 초반에 걸쳐서 뚜렷하게 드러나고 있다. ADSL 기술의 본격적 도입으로 인한 인터넷 매체의 급격한 대두는 대본소 및 대여점 중심의 무협소설의 소비를 변화시켰다. 이러한 지점이 그동안 제대로 연구되지 않았고 이에 따라 PC통신과 인터넷 매체 사이의 변화를 다룬 연구가 부재한 상황이다. 이 글에서는 무협소설을 중심으로 이를 살펴보았으며, 이를 통하여 몇 가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무협소설은 인터넷 매체 중심으로 전환되며 출판 시스템의 변화가 있었다. 또한 한 층 서사의 길이가 길어졌으며, 서사의 규모적 측면 또한 확장되는 경향이 있었다. 이러한 부분을 통해 살핀 결과, 그간 ‘신무협’으로 통칭되던 90년대 중반 이후 무협소설은 지면형 무협소설과 게시판형 무협소설로 분류하여 볼 수 있었다. 이를 통하여 본다면, 당시 장르소설에 대한 논의를 좀 더 풍성히 할 수 있을 것이다.
본 연구는 90년대 통신 공간이 장르 창작자들의 정체성 모색과 나아가 무협-판타지라는 관습적 스타일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 공간적인 사유를 통해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60년대 홍콩・대만의 무협소설을 수입・번안하여 시작된 한국 무협의 시장은 시장 질서가 제대로 확립되지 않은 상황에서 그저 돈을 버는 것에만 목적을 둔 나머지 80년대에 쇠락하였다. 한국 시장에서 다시금 무협이 성행하게 된 것은 신무협 작가들의 시도 때문이었고, 만화방이라는 유통 공간에서 서점으로 이양된 ‘무협’ 장르는 90년대 마초적인 남성들의 정념과 결합하며 독자적인 의미를 획득하며 장르의 시공간에서 근대화에 성공하였다. 90년대 동시기에 발흥한 한국 장르판타지는 동양적 환상의 맥락이 아니라 해외의 파편적인 환상을 혼성모방하여 만들어낸 키치의 결과물이었다. 그들은 온라인 공간에서 다양한 창작담론들이 놓여진 상황에서 게임과 만화책, 애니메이션 등의 감성을 복제한 뒤 아무런 기반이 없었던 디지털 공간에서 자신만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것에만 집중하였다. 그들은 젊고 의욕 있는 편집자들의 행보로 인해 갑작스럽게 시장에 작가로 호출되었고, 그들의 작품은 ‘순문학’이란 타자에 의해 무협과 SF 등과 함께 ‘장르문학’으로 틀 지워졌고, 30년 이상 문법을 쌓아온 무협은 판타지라는 형상이 중세의 시기를 겪지 않고 갑작스러운 ‘근대’로서 현현될 수 있도록 근원적 질서를 형성하는 동시에, 판타지라는 결과물로써 과거화되고 해체된다. 본 연구는 80년대를 거치며 포스트모던적 소비대중 사회가 도래할 시기에 맞춰 폭발적으로 변모하였던 판타지와 무협 장르의 창작-유통 공간에서 창작자들의 정체성을 모색하는 한편, 변화하는 매체적 공간이 서사와 장르의 관습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 분석함으로써 비슷한 구조에서 이루어지는 웹소설 연구의 토대를 닦는 것에 의의를 둔다.
이 글은 1980년대 일본에서부터 1990년대 <짱>에 이르는 학원 폭력 만화 장르 특유의 초창기 문화정치 계보를 추적한다. 기존의 논의는 <짱>을 한국적 학원 액션물의 측면에서만 독해했다. 이와 달리, 이 글은 <짱>을 학원 폭력 만화 특유의 보편적인 장르 관습과 문화정치를 탁월하게 현지화한 텍스트로 주목한다. 본론에서는 우선, <짱>과 직간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고 판단되는 일본의 학원 폭력 만화 장르 고유의 남성향 서브컬처의 문화정치적 맥락을 살펴본다. 그리고 이에 대한 탁월한 현지화의 사례로서 <짱>의 지역성과 주인공 현상태의 캐릭터성에 대해 자세히 논할 것이다. 결론에서는 동아시아의 초국가적 서브컬처가 각 지역의 시민사회 영역에서 유의미한 문화정치 담론을 제공하는 공통적인 커뮤니케이션 양식이 될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한국과 일본은 미국 주도의 동아시아 자유 진영에 속한 자본주의 국가체제로 발전을 구가했다. 특히 두 국가의 자본주의 체제는 수도 중심의 철저한 관료주의 사회 재생산 체제로서, 노동자계급의 정치운동과 소외감을 지속적으로 비가시화해왔다. 비엘리트 도시적 남성성 문화에 기반한 장르 관습이 한국에 유의미한 서브컬처 레퍼런스로 착근한 사회문화적 맥락을 이러한 ‘아시아적 지평’에서 생각해 볼 수 있다.
본 연구는 1989년부터 2013년까지의 기간 동안 한국 무협 게임에서의 ‘무협’ 개념 정의와 재현의 변화를 분석하였다. 이 연구는 한국 게임에서의 ‘무협’ 개념과 해당 게임의 재현 방식을 분석하여, 무협과 게임이 어떻게 만나며 어떠한 변화를 보였는지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를 통해 무협 연구에 있어 무협 게임의 특수성을 강조하고, 그 위치를 파악하는 것이 주요 목표이다. 연구 결과, 한국 무협 게임에서의 ‘무협’ 개념과 재현은 세 가지 시기로 구분될 수 있었다. 첫째로, 1989년부터 2001년까지는 게임을 통한 무협의 시뮬레이션적 재현을 목표로 한 시기다. 특히 MMORPG 개발자들은 꾸준한 수련과 개인 이야기를 기반으로 한 스킬 학습, 랜덤 요소 등을 통해 무협을 재현하고자 시도했다. 둘째로, 2002년부터 2009년까지는 무협 게임의 재현 방향성이 시뮬레이션적 재현에서 중국풍이나 동양풍 배경의 허구적 재현으로 변화하는 시기였다. 이러한 변화는 중국 시장과의 접촉과 관련이 있었는데, 한국이나 가상 대륙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들이 중국 시장과의 상업적 이유로 퓨전 판타지나 오리엔탈 판타지 게임으로 분류되며, 이는 동양 판타지로서의 무협 개념으로 이해되는 모습이 나타났다. 이로 인해 한국 무협을 시뮬레이션으로 재현하려는 시도에도 불구하고, 점차적으로 옛 중국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들이 ‘무협 게임’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마지막으로, 2010년부터 2013년까지는 ‘무협 게임’이 가상의 동양을 배경으로 하는 게임으로 분류되었다. 이 시기에는 중국 시장의 변화로 인해 중국적 요소가 삭제되고 동양풍의 가상적인 공간을 배경으로 무협을 재현하려는 시도가 강조되는 특징이 있었다. 또한 유저 연령이 상승하고 중국의 무협 게임과의 경쟁해야하는 상황이 되었기에, 게임 개발자들은 처음으로 무협을 접하는 유저들을 유인하기 위해 무협을 시각적 요소 중심으로 재현하였다. 이때 주로 참조한 것은 무협 영화였으며, 이 시기의 ‘무협 게임’은 철학이나 규범보다는 자유로운 이동법, 가상의 동양적인 공간, 과장된 액션을 통해 무협을 재현하는 게임을 지칭하게 되었다. 결론적으로, 무협과 게임은 ‘무협 게임’이라는 개념 안에서 갈등 관계를 갖고 있었으며, 초기에는 무협 소설, 영화, 만화 등 다른 매체를 기반으로 한 무협의 재현이 주도적이었지만, 이후에는 게임의 편의성과 상업성이 우위를 점하게 되었다. 또한 중국 시장으로 진출하기 위해 게임을 개발하는 과정에서 ‘무협 게임’의 개념은 한국 시장의 수요와는 별개로 축소되고 변형되었으며, 이는 한국 무협 게임의 특성으로 수용되고 플레이어들에게 인식되기도 했다. 이 점은 ‘무협 게임’이라는 장르 구분이 대상을 명명하고 관습을 사용자들과 공유하기 위한 수단을 넘어 상품으로서 기능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본고는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극장으로 급격히 유입되었던 ‘전후(戰後)’의 영화들에 내장된 문화사적 의미를 재조명하고, 한국의 전후 세대들의 영화적 실천들을 조직했던 지각 장의 변화 양상을 시론적(試論的) 차원에서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는 ‘전후’의 지각 장으로부터 파생된 영화-이미지가 내전을 경험한 남한의 관객들과 정동하고 정동됨으로써(to affect and to be affected) 냉전적 주체화/개체화에 선행하는 ‘준안정적 잠재적 에너지의 장’을 형성하는 국면을 사유하기 위한 예비적 작업으로서, 1950년대 외국 영화를 소비하는 문화적 실천에 내재된 정치적 역량들을 정동 이론의 관점에서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삼는다. 국제적 분쟁의 대리자(agency)로서 남한은 전쟁을 계기로 자유진영의 미디어 네트워크의 중요한 거점이 되었고, 인간의 존엄성을 극단적 수준으로 파괴했던 내전(內戰)의 경험은 신체적 차원에서 ‘전후’ 세계의 동시대적 영화-이미지와 공명할 수 있는 조건들을 창출했다. 결과적으로 한국전쟁은 한국 사회를 ‘전후’ 세계의 지각 장으로 급격히 편입시키는 사건이었다고 할 수 있다. 이러한 문제의식에 착안할 때, 한국전쟁 이후 남한의 극장으로 급격히 유입되었던 ‘전후’의 영화들에 내장된 문화사적 의미는 영화-이미지가 야기하는 지각 장의 변화와 함께 영화를 매개로 한 세대론적 감각의 형성이라는 맥락에서 재조명될 필요가 있다. 특히 본고에서는 미국영화 수용의 문화사적 함의에 주목하는데, 한국전쟁을 계기로 미국식 제도와 문화를 적극적으로 받아들임으로써 사회 제반 영역에서 진행된 미국화(Americanization)의 문제는 비단 ‘네이션 표상’ 차원에 한정되는 것이 아니라 질(質)화되지 않은 순수 경험의 잠재적 장을 형성하는 차원에서 이해될 필요가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본 연구는 수용사의 맥락에서 1950년대 한국영화사를 새롭게 조망하면서 전후 한국사회에서 영화를 매개로 형성된 세대론적 감각과 그것에 내포된 문화・정치적 의미를 분석하는 작업으로서 의미를 지닌다. 또한 외국영화의 영향력을 실증적 차원에서 검토함으로써 수용사 연구의 초석을 다지는 의미를 지닌다고 할 수 있다.
무명의 독립운동가라고 알려져 온 <눈물 젖은 두만강> 속의 노랫말 ‘그리운 내 님’이 2000년대에 들어 거물 사회주의자 박헌영(2004), 민족주의 독립운동가 문창학(2016)이라는 주장이 잇따라 제기되었다. 노랫말을 두고도 1절을 다른 사람이 지었다는 두 가지 견해가 1980년대 이후 등장했다. 본 연구의 목적은 ‘그리운 내 님’ 및 작사가의 자리매김이다. 박헌영설의 골자는 기왕의 작사가 김용호는 실재 인물이 아니며, 배우 김용환이 영화 촬영차 머물던 두만강변에서 박헌영의 탈출 소식을 접하고 작사했다는 것이다. 박헌영설의 가장 큰 문제점은 교차 검증의 부재이다. 김용호는 분명히 실재한 인물이었으며, 김용환은 배우가 아니라 가수 겸 작곡가로 <눈물 젖은 두만강>과는 무관한 존재였다. 문창학설은 작곡가 이시우가 작곡뿐만 아니라 작사까지 한 것처럼 언급한다. 문창학의 거사, 체포, 재판, 사형이 모두 조선 땅에서 이루어졌는데도, 두만강가 출신이라는 이유로 노래의 탄생 배경으로 알려진 만주의 도문과 연결했다. 신문 지면을 통해 꾸준히 보도된 문창학의 체포, 재판, 총살 소식을 풍문으로도 듣지 못한 채 부인이 남편을 찾아다녔다는 주장도 설득력이 약하다. 마지막으로 김용호 단독(작사)설, 이시우・김용호 합작설, 한명천・김용호 합작설을 차례대로 살펴보았다. 검토 끝에 한명천・김용호 합작설, 요컨대 한명천이 1절을 짓고 김용호가 2절과 3절을 완성했다는 결론을 이끌어내었다. 그 배경으로 발표 당시에는 무명의 문학청년이어서, 분단 이후에는 북한의 유명 시인으로 명성을 얻은 월북 시인 한명천을 내세우기 어려웠던 남북분단이라는 상황이 있었다. <눈물 젖은 두만강>은 남북한이 함께 사랑하는 민족가요의 반열에 올라선 가요이다. 필자는 두 개의 ‘그리운 내 님’ 주장과 1절 작사가를 둘러싼 세 가지 이설을 정리했다. 그 결과, ‘그리운 내 님’과 1절 작사가가 제 자리를 찾았다고 생각한다.
이 글은 애드리안 이바키프(Adrian Ivakhiv)가 2013년 저서 『영상이미지의 생태학: 영화, 정동, 자연』(Ecologies of the Moving Image: Cinema, Affect, Nature)에서 제시한 과정-관계적 분석틀을 영화이론의 역사 안에 위치에 지으면서 방법론적 의의를 살펴본다. 이바키프는 지형학적 사상(geomorphism), 의인화된 사상(anthropomorphism), 그리고 생물적 사상(biomorphism)의 측면에서 영화가 세계를 구축하고 주체를 만들어내는 방식을 설명한다. 여기서 그는 영화의 의미구성에 있어 해석체의 위치를 중요시하는 퍼스의 기호학을 기반으로 영화 관객성 이론에서 주변화된 경험의 차원을 강조한다. 그리고, 화이트 헤드, 들뢰즈를 비롯한 과정 철학자들의 논의를 활용하면서 21세기 대두된 사변적 실재론(speculative realism)과 접속한다. 상관주의를 비판하는 사변적 실재론은 산업 혁명 이후 인류가 지구 환경에 미친 영향을 반성하고 인간의 존재 조건을 유물론적 차원에서 재검토하도록 요청한다. 따라서, 과정-관계적 영화 분석은 사변적 실재론의 관점에서 2000년대 환경주의와 함께 등장한 에코시네마의 개념을 확장한다. 나아가, 이바키프가 암시한 에코시네마의 정동적 역량은 생태철학적 관점에서 포스트휴머니즘을 재고할 수 있게 한다. 따라서, 이 논문은 『영상이미지의 생태학』이 현대영화이론의 현상학적 흐름을 이어가면서 생태철학적 입장에서 물질적 전회를 시도하고 있으며, 정동적 차원에서 비판적 포스트휴머니즘 논의에 기여한다는 점을 논의할 것이다.
This paper discusses the significance of the process-relational framework within the history of film theory that Adrian Ivakhiv suggests in his 2013 book, Ecologies of the Moving Image: Cinema, Affect, Nature. The author highlights three modes of filmic representation, the geomorphic, the anthropomorphic, and the biomorphic, in order to explain how cinema continuously constitutes worlds and subjects. Based on Charles S. Peirce’s triadic model that postulates interaction between the representamen, an object, and an interpretant, Ivakhiv revisits the cinematic experience that has been marginalized in the theories of film spectatorship. His process-relational approach, which is also related to Alfred North Whitehead and Gilles Deleuze’s process philosophy, also encounters speculative realism, a new philosophical movement emerging in the 21 century. Speculative realism suggests affective relationship between objects, challenging correlationism in the Anthropocene epoch. It helps us to reconsider the significant human impact on the ecosystem since the Industrial Revolution and rethink the condition of human existence from a materialist perspective. Thus, this paper argues that Ivahkiv expands the concept of eco-cinema emerging with environmentalism in the 2000s, in terms of speculative realism. The affective possibility of eco-cinema also can enrich discourses of the posthuman ecophilosophically. In sum, this paper argues that following the phenomenological trend in contemporary film theory, Ecologies of the Moving Image attempts to make a material turn with eco-philosophy, and thus it can contribute to critical posthumanism in terms of affec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