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0376-4672
삶과 죽음은 언제나 인간에게는 해결해야 할 문제였고, 치과질환도 피하지 못할 것이었다. 이러한 치과질환을 보다 좋은 위치와 조건에서 치료하기 위하여 장치 및 기구를 개발하게 되었다. 이와 같이 인간은 그 문명과 함께 도구를 사용해 오고 있다. 이 치과 장비 및 기구 중에 중요한 하나가 치료의자이다. 18세기 이전에는 치과 치료를 하기 위하여 바닥에 앉히든가, 눕히든지, 필요한 경우 생활 의자에 앉히는 것이 보통이었다. 이 치료의자에 대해서 관심을 처음 가진 치과의사는 삐에르 포사르(Pierre Fauchard)였다. 그는 목제 손잡이가 달린 의자, 안락의자나 침대를 사용했다1). 1790년경 미국 보스톤에 거주하는 치과의사 프래그(Josiah Flagg)는 머리받침과 팔걸이식 기구대를 갖춘 치료의자를 만들었다2). 1848년 미국인 한젯(H. M. Hanchett)이 현재와 같은 형태를 갖춘 치료의자를 만들게 되었다. 머리를 고정시키고, 발을 올려놓은 곳, 등을 대는 판과 승강할 수 있는 장치를 만든 것이었다. 1848년 씨엘(F. Searle), 1849년 에이제(A.Meritt Asay)와 1855년 볼(T. C. Ball)에 의하여 개량되었다. 1870년 스노우덴과 카우만(Snowden and Cowman)은 타구를 부착시켰다. 1876년 화이트(S. S. White) 치료의자가 나왔고, 윌커슨(B. M.Wilkerson) 치료의자가 시판되었다3). 1885년 선교사 알렌(H. N. Allen)이 제중원을 운영하면서 발치(拔齒)를 시술한 것이 한국근대치의학의 효시였다. 그러나 그가 환자를 어떤 자세로 발치를 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없고, 다만 사용된 발치 감자는 연세대학교 박물관에 남아 있다4). 1893년 한국에서 치과의사로 처음 개업한 치과의사는 노다(野田應治)였다5). 그가 어떤 의자를 사용했는지에 관한 기록은 남아 있지 않다. 다만 목제 의자를사용했고, 후트 엔진(foot engine)을 사용했으리라 추정할 뿐이다. 그의 진료소 입구에 진열장을 마련하여 치과에 취급되는 각종 그림이나 보철물을 전시하였고, 간판에는 총의치 등의 그림을 그려 넣었던 것으로보아 격식을 갖춘 진료실을 갖추었으리라 추정되기 때문이다. 1902년 9월 치과 장비 및 기구에 관한 기록이 보인다. 일본인 입치사가 코모리(小森)는 치과치료소를 진고개(泥峴)의 욱여관에서 개설했다6). 이 병원에 후트엔진(Foot engine)과 배타기가 부착된 간단한 목재의자를 가지고 있었다. 2~3개의 발치 겸자와 엘리베이터(elevator), 간단한 몇 개의 기공 기구 등과 약품으로는 페놀캄파와 옥도정기, 붕산 등을 가지고 개업하였다7). 1914년 6월 19일경 한국인 최초의 치과의사 함석태는 서울 남부 삼각정 1번지에서‘수술무료’라는 안내를하며 개업하였다8). 이와 같이 함석태는 보철 등 치과일반을 치료하면서 구강외과에 주력한 것으로 보아 구강외과 치료에 충분한 진료 시설을 갖추었으리라 추정된다9). 1914년 3월 나기라(柳樂達見)가 총독부의원에 왔을 때 치과 진료 시설은 치과치료용 의자는 목제로 4대, 치과용 엔진은 후트 엔진(foot engine)뿐으로 빈약하였다10). 전기 엔진은 일본에서도 극소수만 사용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기라 다쓰미는 전기용 엔진의 필요성을 총독부의원장에게 역설했고, 또 전신마취용 소기(笑氣)도 구입했다11). 1924년 4월 경성치과의학교 부속의원 장비는 3학년생의 임상실습을 위하여 총독부의원 안에 치료의자 5대를 갖춘 10평정도의 진료실을 만들었다. 1924년10월 황금정(을지로)의 일본생명 빌딩에 경성치과의 학교 부속의원 시설과 장비는 치료의자 27대였고, 특별히 예진 및 특진실은 승강의자 1대가 준비되었다. 독일 지멘스의 엔진과 렌트겐, 독일 하노버 자외선 장치, 태양등을 갖춘 설비였다12). 1931년 10월 28일 세브란스연합의학전문학교 치과센터가 준공되어 독일 릿터사 제품의 치과 치료대 10대와 미국 화이트(S. S. White)사의 각종 기구가 들어오기도 했다13). 1925년 6월 15일 발간된 조선치과의학회에서 발간한『조선치과의학회잡지(朝鮮齒科醫學會雜誌)』1호에는 한국 서울에 반센(滿鮮)치과상회와 고토후운도(後藤風雲堂) 치과기계부에서 치과 장비 및 기구를 취급하였던 것을 알려주고 있다14).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치과 장비 및 기구는 일본의 영향을 받았다고 볼 수 있다. 일제가 패망 후 나라는 독립되었다. 그러나 일제의 소비시장이었던 치과 기자재의 산업은 아무 것도 없던 상태이었다. 현재는 치과 기자재의 산업도 치과계와 마찬가지로 세계 수준으로 발전하고 있다. 이러한 발전의 전단계인 일제강점기조선에서 광고 되어진 치과 장비 및 기구를 돌아보는 일은 의의 있는 일이라 생각된다. 본 연구에 이용된 자료는 일본치과기업협의회 업계사편찬위원회사 편찬한『일본치과업계사(기계편과 유통편)』와 조선치과의학회에서 발간한『조선치과의학회잡지(朝鮮齒科醫學會雜誌)』, 경성치과의학회의『경성치과의학회잡지(京城齒科醫學會雜誌)』, 경성제국대 학의학부 치과학교실에서 발간한 월간지『조선지치계(朝鮮之齒界)』와『만선지치계(滿鮮之齒界)』에서 발췌하였다15). 이들 자료에는 치과 장비 및 기구 광고가 들어 있어 일제강점기 조선에서 치과의사들이 사용한 치과기자재 변천 연구를 할 수 있게 하였다.
《皇城新聞》
《매일신보》
《동아일보》
『朝鮮齒科醫學q會雜誌』
『京城齒科醫學L會雜誌』
『朝鮮之齒界』
『滿鮮之齒界』
Boots, J. L. The New Dental Clinic at Seoul, Korea 『The Korea Mission Field』,vol. 28 no. 1, 1932.
『朝鮮齒界』, 제1권 제1호, 1946.
大澤義誠「, 조선치과변천 이야기」『, 대한치과의학사연 구회지』, 1960.
은중기「, 한말의 치과업계에 대하여」『, 대한치과의학 사연구회지』, 1960.
李漢水, 『東西齒學見聞記』, 석암사, 1977.
업계사편찬위원회, 『일본치과업계사(기계편)』, 일본 치과기업협의회, 1986.
신재의, 『한국근대치의학교육사』, 참윤, 2005.
이병태, 『치의학사전』, 출간 예정 사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