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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과학기술정보연구원(KISTI) 서울분원 대회의실(별관 3층)
  • 2024년 07월 03일(수) 13:30
 

대중서사연구

  • P-ISSN1738-3188
  • E-ISSN2713-9964

국책영화를 통해 본 1970년대 검열의 준거와 영향 - 영화진흥공사의 <증언>(1973)을 중심으로

Criteria and Effects of Censorship in the 1970s Seen through Korean National Policy Films ― Focusing on the Korean Film Promotion Corporation’s The Testimony (1973) ―

대중서사연구 / 대중서사연구, (P)1738-3188; (E)2713-9964
2022, v.28 no.3, pp.277-315
https://doi.org/10.18856/jpn.2022.28.3.008
박유희 (고려대학교)

Abstract

본고는 1970년대 한국영화 검열의 준거와 영향을 밝히기 위해 영화진흥공사의 대표작이자 국책영화의 성공작으로 알려져 있는 <증언>(1973)을 중점적으로 살펴본 것이다. 국책영화는 검열을 받지 않았으리라는 선입견과는 반대로 정책을 선전하는 모범적인 영화여야 했기에 정권의 통제와 간섭을 많이 받을 수밖에 없었다. 국책영화 역시 검열절차를 밟아야 했던 것은 물론이고, 제작과정 자체가 실질적인 사전검열과정이기도 했다. 이에 본고에서는 대표적인 국책영화의 제작과 흥행 과정은 검열의 준거와 영향을 드러내는 표본이 될 수 있다고 보고, <증언>의 제작부터 흥행까지 추적하여 당시 정권이 만들고자 했던 영화의 실체와 실상을 구명(究明)하고자 했다. 2장에서는 1972년 이후 권위주의체제가 강화되는 가운데 영화진흥공사가 제작하는 기획영화가 <증언>과 같은 반공역사물이 될 수밖에 없었던 맥락을 살폈다. 3장에서는 <증언>과 함께 기획되었으나 대조적인 길을 간 <들국화는 피었는데>를 통해 유리한 물리적 조건 속에서도 영화가 붕괴되어 간 것은 검열 준거에 해당하는 제작지침의 표리가 달랐던 데에서부터 근본적인 원인이 있었음을 밝혔다. 4장에서는 <증언>의 대본들과 프린트, 검열서류를 검토하여 기획의도가 영화로 재현되는 과정을 추적하고 그 과정에서 형성되는 수사학과 함의를 짚어보았다. 아울러 영화진흥공사 제작 관련 서류를 검토하여, <증언>은 일반적으로 알려져 있는 성공신화와는 달리 산업적으로 실패한 영화였음을 논증했다. 총력안보가 주창되면서 제작지침에서 ‘반공’은 전면화되지 않았으나 오히려 영화 전반(全般)을 통어하는 최종심급에 자리했다. <증언>은 잔혹과 숭고의 리듬으로 극단적 반공을 성화(聖化)된 종교적 이념으로까지 격상시키며 표리부동한 제작지침을 충실히 구현했다. 국책영화를 기획했던 의도나 제작지침이 검열의 준거이기도 했으므로 <증언>의 제작과정과 수사학은 1970년대 검열과 텍스트의 상관 양상을 보여준다. 또한 정권이 야심차게 제작하고 지원했던 <증언>이 산업적으로 실패한 것은 검열로 상징되는 1970년대 영화통제정책이 시장에 미친 영향을 증언한다.

keywords
Korean national policy film, censorship, Anti-communist historical genre, All-out national security, Sanctification of anti-communism, cruelty, sublimity, The Testimony, Wildflowers on the Battleground, 국책영화, 검열, 반공역사물, 총력안보, 반공의 성화(聖化), 잔혹, 숭고, <증언>, <들국화는 피었는데>

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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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증언> 프린트(117분)

2.

오리지널시나리오 『아! 어찌 우리 그날을』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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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들국화는 피었는데> 심의서류, 오리지널시나리오, 검열대본, 녹음대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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