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738-3188
본 연구는 영화 <자산어보>에 나타나는 유배 서사의 특징을 분석하는데 중점을 둔다. 유배 서사를 구성하는 가장 기본적인 요소는 유배지와 유배인이다. 유배라는 형벌 자체가 낯선 곳에서의 삶 살기를 통해 죄인에게 벌을 주는 방식이기 때문이다. 유배지는 자연 풍광 자체가 감옥과 같은 기능을 한다. 따라서 실체적 위용이 유배인을 위축시키는 요인이 되기도 한다. 또한, 유배지는 끊임없이 유배인으로 하여금 자신의 처지를 환기시킨다. 그 공간을 떠나야만 죄인의 신분에서 벗어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공간에서 유배인은 기한이 정해져 있지 않은 유배 살이를 견디기 위하여 저술 활동이나 지역민과의 교류를 활발하게 진행한다. 영화 <자산어보>는 이러한 유배 서사의 특징이 잘 반영되어 있으며, 특히 유배지 ‘흑산’과 유배인 ‘정약전’의 유배 살이 과정을 긍정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유배’는 ‘득죄’를 기반으로 하기 때문에 부정적으로 인식되기 쉽다. 그러나 ‘유배 서사’는 ‘낯선 환경에 적응하며 살아가는 사람의 이야기’라는 보편적인 서사를 담고 있기 때문에 충분히 긍정적인 스토리텔링이 가능하다. 영화는 유배지 ‘흑산’을 치유의 공간으로 묘사하고 있으며, 그 공간 안에서 지역민과 동화되어 살아가는 정약전의 모습을 통해 유배의 긍정적인 면을 부각한다. 유배 서사를 정립하는 목적 중 하나는 낯선 곳에서의 두려움을 극복하고 회복을 도모하는 유배인의 모습을 통해 인간 삶에 대한 이해를 한층 더 높이는 것이다. 영화 <자산어보>는 그동안 영상 매체에서 제대로 다루지 않았던 유배 과정을 면밀하게 그려내고 있다. 이 작품의 분석을 통해 유배 서사의 의미를 발견하고 유배의 긍정적인 이미지를 새롭게 도출할 수 있다는 점에서 본 연구의 의의가 있다.
본 연구는 영화 <69세>를 ‘기록’이라는 모티프에 주목하여 분석한다. <69세>는 노년여성 인물에 대한 전형성을 극복한다. 본고는 이 변화가 내포하는 의미와 함께 이 변화에 따른 반작용 현상을 살핀다. 영화 내에는 고소장과 고발문, 나아가 이름·표제가 생략된 수기까지 세 차례의 ‘기록’이 등장한다. 이는 기존 노년여성 인물 묘사에서 반복되던 수동적 전형성을 극복하는 중요한 모티프이며, 이 모티프로써 <69세>가 재현한 노년여성은 ‘뭉뚱그려진’ 타자가 아니라 ‘이름을 가진’ 주체가 된다. 등장인물이 수행하는 행위로서의 ‘기록’은 흥미롭게도 영화로서의 매체적 특성 자체와 <69세>에 대한 악성댓글들의 의미를 곱씹어볼 수 있게 한다. 우선, <69세>는 한 편의 ‘장편 영화’로서, 법적·제도적 언어가 실재의 가능성 자체를 무화(無化)할 수 있는 언어라는 사실을 지적한다. 영화의 기반이 된 실제 사건의 피해자와 영화 속 주인공은, 공적 기록의 형태가 아니라 ‘유서’와 ‘수기’의 형식으로 자기 서사를 가질 수 있었다. 이들의 자기 발화는 객관의 문법만으로 사실 여부를 측정·심문하는 제도적 언어의 오류를 지적한다. 또한 <69세>의 온라인 평가플랫폼에 달린 악성댓글들도 유형화해 함께 살핀다. 그 중 두드러지게 반복되는 유형들을 논한다. 이는 알고 있는 세계만 재생산하려는 동어 반복의 메커니즘에서 파생된 글들이다. 또한 재현에 대한 평가 영역에서 실재를 논하는 것은, 곧 이들의 읽기 결핍 현상과도 맞물린다. ‘영화를 보지 않음’을 발화하면서 동시에 ‘보지 않고 평함’을 수행하는 이들의 쓰기는 아이러니다. 이들의 평가는 ‘존재할 수 없는 상태로 존재’한다. 이렇듯 <69세>의 함의를 영화 안팎으로 살피는 일은, 최근의 문화 현상들에 짙게 기입된 ‘쓰기/읽기 행위의 결핍’들의 이유를, 동시에 ‘타인에 대한 재현’과 ‘타자화’는 동의어가 아니라는 사실을 읽어내게 한다.
<미나리>는 1980년대 미국에 이주한 한인 가족을 중심으로 이야기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동시대 전세계적인 공감을 얻었다. 이 논문은 그 이유를 동시대 상황 및 담론과 관련시켜 해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미나리>의 주인공 제이콥은 가부장으로 호명된 인정투쟁의 주체이다. 그는 자신을 ‘미국에서 성공한 한인’이라는 기표에 동일시함으로써 미국 사회의 상징계적 질서를 내면화하고 이에 맞춘 동일화를 수행함으로써 주체화를 꾀한다. 그러나 ‘아메리칸 드림’이라는 이데올로기는 값싼 노동력을 확보하려는 미국의 의도를 은폐하고 있기에 그의 상징계적인 욕망 달성은 쉽지 않다. 이런 상황은 제이콥과 모니카의 갈등을 불러일으킨다. 제이콥이 자아이상을 실현시키려고 하면 할수록 자기부정에 이르게 되고, 타자까지도 동일화시키려는 과정에서 폭력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에 반해 모니카는 자신의 취약함을 인지하는 주체이다. 모니카가 ‘함께’를 강조하는 것은 자신과 타자의 취약함과 의존의 불가피성을 알기 때문이다. 순자는 시스템이 요구하는 ‘할머니’라는 호명에 동화되지 않은 탈중심화 주체이다. 순자는 데이빗에게 ‘말걸기’로 다가간다. 순자는 데이빗이 진정한 주체화로 나아가게 하는 조건이자 세계가 된다. 데이빗이 제이콥으로부터 부여받은 ‘쓸모있는 사람’이라는 자아이상도, 모니카로부터 투사된 대타자 신에 대한 두려움도 순자로 인해 해제되기 시작한다. 순자로 인해 발생한 화재와 창고의 전소는 상징계적 차원에서 보았을 때 완전한 실패이자 절망적 사건이지만, 바로 이 실패가 취약성과 의존성을 깨닫게 되는 윤리적으로 전회의 계기가 된다. <미나리>는 상징계적 욕망과 환상을 가진 성과주체가 자신이 취약함을 깨닫고 탈중심화 주체가 되어 가는 과정을 담고 있다. 영화는 이러한 주체화를 통해 타자에 대해 책임을 갖는 윤리적 전회가 가능함을 보여주고 있다. 이 때문에 <미나리>는 팬데믹 시대가 요구하는 가치를 품고 있는 영화이며, 이 논문은 그 가치를 드러내었다는 점에서 의의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2018년 tvN에서 방영한 드라마 <미스터 션샤인>은 지금까지의 역사 드라마에서 크게 조명받지 못했던 20세기 초 대한제국 시기 한성을 배경으로 하는 작품이다. 드라마는 의도적인 시공간의 착종(錯綜)을 통해 1910년대 한성과 1930년대 경성의 풍경을 뒤섞으면서, 극의 역사성과 고증에 관한 다양한 논의를 불러일으켰다. 그렇다면 <미스터 션샤인>이 굳이 식민지 시기의 ‘모던’한 풍속을 소환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한 1930년대 경성이라는 배경은 드라마의 서사 및 로맨스와 어떻게 연관되는가. 이 연구에서는 2000년대 이후 유행한 ‘식민지 모던’ 재현의 연장선에서 <미스터 션샤인>을 살펴봄으로써, 지금까지의 논의에서는 크게 주목받지 못했던 드라마 속 캐릭터들의 네이션과 젠더가 지닌 의미를 규명한다. <미스터 션샤인>에 나타나는 시공간의 착종은 소재적 측면에만 국한되는 게 아니라, 식민지 경성이라는 시공간에서 펼쳐지는 로맨스의 관습적 등장인물과 서사 구조까지 일정 부분 참조하며 이루어지고 있다는 점에서 중요하다. 드라마는 2000년대 이후 식민지 경성을 배경으로 한 영화·드라마들을 비판적으로 계승하고 있는데, 이때 분명하게 드러나는 것은 주요 인물들의 특성과 젠더에 따라 다르게 구축되는 네이션과의 관계이다. <미스터 션샤인>의 유진 초이는 이전까지의 ‘모던 보이’들과는 달리 일본과 조선 사이에서 갈등하지 않는다. 대신 그는 미국 국적과 군인 신분을 바탕으로 자신의 초국적·군사주의적 남성성을 과시하면서 끊임없이 여성 주인공을 보호한다. 반면 여성 주인공인 고애신은 당차고 주체적인 인물로 설정되어 있음에도 불구하고, 로맨스를 통해 남성 주인공을 조선으로 돌아오게 만드는 역할을 수행한다는 점에서 2000년대 이후 식민지 로맨스의 여성 주인공들과 유사한 모습을 보인다. 이는 식민지 시기 ‘모던’의 재현 양상 변화에 관한 탐구이자, 새로운 로맨스의 등장이 젠더와 네이션에 관한 우리 시대의 인식을 어떻게 반영하는가를 보여주는 논의이기도 하다. 드라마는 ‘지금’ 이 시대의 욕망과 논리를 역사 속 사건과 인물에 투영하기 때문이다. 특히 2000년대 이후 이루어진 1930년대 식민지 경성에 대한 재현에서 모던을 향한 매혹과 민족주의의 논리가 위태롭게 동행해왔다는 점을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는 개인과 젠더, 민족과 국가의 관계에 대한 복합적이고 때로는 모순된 인식이 그동안 1930년대의 풍경으로 표출되어 왔음을 드러낸다. 그리고 <미스터 션샤인>의 성과와 한계는 모두, 로맨스를 통해 이와 같은 위태로운 동행의 문제를 적절하게 봉합함으로써 이루어진 것이기도 하다.
신상옥 감독, 최은희 주연의 북한영화 <소금>(1985)은 방언을 사용했다는 점, 강간과 출산의 장면을 묘사하고, 여성 신체를 노출시켰다는 점 등에서 기존 북한영화계의 금기를 깬 사례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깨어진 금기들은 주로 최은희가 재현한 ‘혁명적 어머니’ 형상과 섹슈얼리티 문제의 측면에서 해석되어 왔다. 반면 문화어(표준어)만이 재현될 수 있었던 북한영화계의 방언 기입 문제는 면밀히 다루어지지 않았다. 이 글에서는 <소금> 속 방언을 다양한 요소들이 중층적으로 결합되어 있는 하나의 공간으로 파악하고, 방언 인용의 안팎을 포착함으로써 신상옥·최은희가 북에서 제작한 영화들이 갖는 함의를 재독하고자 한다. 김정일은 1970년대 후반 신상옥·최은희를 납북시킨 후 적극 후원함으로써 북한영화의 세계화와 산업화 이후 등장한 새로운 형태의 대중과 공명할 수 있는 영화제작을 요구했고, 두 영화인은 상대적으로 자유로운 환경에서 다종한 시도를 행할 수 있었다. <소금> 속 방언 재현 역시 그 궤도에서 가능했는데, 신상옥과 최은희는 <소금>에서 ‘리얼’함을 살려 북한 내 관객을 겨냥하기 위한 장치로 방언을 사용했다. 최은희의 신체 위에 ‘각성하는 (조선)여성의 생활력’을 새겨 넣음으로써 남북이 아닌 ‘(조선)민족’을 말하고자 한 것이다. 그러나 고통 속에 사는 인민의 삶을 대유하는 언어로는 방언이, 각성 이후의 앎을 표상하는 것이 문화어로 제시되면서 방언은 지역성 혹은 민족성보다 계급성을 부각하는 장치로 탈바꿈한다. 그 자리에서 최은희와 신상옥이 기획한 ‘리얼’한 요소로서의 방언은 문화어의 규범 아래에 포섭된 채 북한의 헤게모니와 조우한다. 요컨대 <소금> 속 방언의 인용 사례는 북한영화계에서 돌출적인 위치에 있었던 신상옥·최은희가 일군 영화적 성과들이 북한 정권의 권역으로부터 불가분한 작업이었음을 드러낸다. 두 영화인의 금기 깨기는 어디까지나 허가된 금기 깨기의 성격을 갖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그들의 작업은 김일성-김정일로 이어지는 정권 승계 과정에서 벌어진 틈새를 포착해낸다는 점에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논문은 셰인 엡팅(Shane Epting)의 『도시 모빌리티의 모럴리티』(The Morality of Urnban Mobility)가 제안하는 도시 모빌리티에 대한 철학적 사유를 소개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오늘날 도시성은 지역과 세대를 막론하고 현대사회의 일상적 전제 조건이 된 만큼 도시 모빌리티를 사유하는 일 역시 도시공학자들만의 몫이 아니라 이동을 수락한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이 시대의 철학이다. 2021년에 발간된 이 책은 도시 모빌리티의 문제에 도덕적 차원을 부여하여 도시의 교통 시스템을 생각할 때 고려해야 할 지점들을 드러내 준다. 엡팅은 도시 모빌리티를 부분전체론(mereology)으로 검토한다. 교통 시스템의 각 부분들을 집합론의 한 부분으로 간주하지 않고 부분과 부분의 역학 관계에 집중하면서 부분전체론적으로 보았을 때 도시 모빌리티가 제기하는 문제와 그에 대한 해답을 보다 유연하게 모색할 수 있다. 이렇게 보았을 때 현 도시 모빌리티가 낳는 부작용의 핵심은 단일기술적 포화 상태에 있으며, 이를 다중기술적 분산으로 전환하는 것이 중요한 문제가 된다. 이를 해결하기 위해 엡팅이 제안하는 것은 약한 인간중심주의(weak anthropocentrism)다. 약한 인간중심주의 하에서 모빌리티에 매개된 부분들의 도덕적 우선순위를 숙고하는 것은 도시 모빌리티 문제를 해결하는 데에 전제되어야 할 하나의 태도이다. 이 책은 도시 모빌리티의 조건과 다양한 스케일의 부분들을 생각할 때 모럴리티 차원을 염두에 두어야 한다고 말한다. 엡팅이 요청하는 도시 모빌리티의 철학은 억압되고 배제된 부분들을 가시화하고 도덕적 질서에 따라 부분들을 재배치하기를 추동한다는 점에서 랑시에르의 ‘모럴’ 개념과 일맥상통한다. 이런 비전은 도시 상상력에 대한 텍스트 비평에 있어 유의미한 조망점을 제공하리라 기대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