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모든 경험이 문학의 자양분이 될 수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여성으로서의 경험은 글쓰기의 장애물이 아닐 수 없다. “남성이 모든 것의 척도이며 그 척도를 만들어 내는 것도 남성이기 때문이다.” 여성작가들이 자신을 표현하는 도구로 사용하는 ‘언어’는 이미 가부장제사회의 권위적인 체계를 그 안에 포함하고 있다. 산업화시기의 여성작가가 처한 딜레마가 바로 이것이었다. ‘경제성장’이 구호 아래, 의식의 보수화가 심각하였던 이 시기에 여성들은 자신의 욕망과 생각을 담아낼 언어가 없었다. 여성을 억압하는 각종의 사회장치들은 ‘낭만적 사랑’ ‘현모양처’라는 말로 포장되어 그들의 경험을 왜곡시키고 있었다. 이러한 시기에 씌어진 엿ㅇ작가들의 작품을 살펴보면 공통적으로 나타나는 특성이 있다. 낭만적 사랑을 찾아 가정을 떠나는 여성의 등장이 그것이다. 가정은 그들의 정체성을 매몰시키는 공간으로 그려진다. 이러한 모티브는 작가와 작품에 따라 다양하게 변화되어 반복적으로 나타난다. 이러한 반복적이고 집단적인 목소리가 여성의 ‘욕망’을 반영한다. 그렇다면 왜 그러한 일탈이 반복적으로 나타나게 되었는가. 이는 여성에게 모순적으로 적용된 근대의식 때문이다. 근대화된 사회는 개인의 개성적 삶에 관심을 기울이게 되고 사랑도 개인의 선택을 중시하게 된다. 우리 근대문학의 초기에 나타난 자유연애 사상이야말로 이러한 근대의식이 소산이다. 이 시기 소설에 나타나는 낭만적 사랑도 이의 연장선상에 있다. 이 시기에는 자본주의의 비정상적인 성장과 더불어 근대화의 이념도 강화되었다. 핵각족화가 진행되면서 여성은 사적 영역의 전문가로서 위치를 확고히 하게 되고 낭만적 사랑에 대한 기대도 강화된다. 하지만 이것이 허구이다. ‘낭만적 사랑’을 걸고 여성에게 ‘순결’과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를 강화하지만 가정은 텅 빈 공간에 불과하다. 남성은 생산을 위해 집밖에서 생활하기 때문이다. 이러한 현실적인 이유로 해서 이 시기 여성작가의 소설에서는 가정에서 이룰 수 없는 ‘낭만적 사랑’을 가정 밖의 절대적이고 열정적인 사랑으로 도피시켜 추구하게 된다. 이 시기 활동하였던 한말숙 손소희 한무숙 박경리 강신재의 작품 속에서 이러한 행위구조들은 낯설지 않게 등장한다. 이러한 소설에 등장하는 여성인물들은 ‘순결성’과 ‘현모양처’의 이데올로기를 모두 전복시킨다. 하지만 이러한 토대 위에서 창조된 인물들의 의식수준이나 행위방식은 당대 가부장제사회의 모순을 심도 있게 지적하는 데 도달하지 못한다. 한무숙의 「유수함」이나 「낙루부근」 같은 작품에서 이와 같은 저항의식과 한계를 살필 수 있다. 하지만 이처럼 모순의 진정한 실체를 파헤치지 못하고 파편적, 감각적으로만 접근한 저항의식은 그 무모함 때문에 오히려 저항성을 잃어버리게 되고 결과적으로는 가부장사회이 이데올로기를 내면화하게 된다. 그들은 한 남자의 아내로 살아가는 일의 행복을 말하는 반동적인 작가가 되거나 운명, 종교라는 비현실적 공간으로 도피하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한말숙의 「아기 오던 날」은 가부장제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되어 있는 모습을 구체적으로 보여준다. 이러한 한계에도 불구하고 이 여성작가들의 ‘사랑’에 대한 집착은 새로운 주의를 요구한다. 90년대 문학에서 ‘집’의 존재 양식이 여전히 중시되고 있는 점을 주시한다면 산업화시기의 여성작가가 보여주었던 욕망의 모습이 여전히 지속되고 있다는 생각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런 맥락에서 여성문학이 보여주는 친밀성에의 요구는 전복적인 혁명의 요소로도 읽혀질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