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이 글은 조선조의 여성작가들에 의해 지어진 한시들을 이 여성작가들이 당대의 여성적 현실 및 여성 언어적 현실에 맞서 구사하고 있는 말하기 전략이라는 측면에서 검토하였다. 전통 시대의 남성비평가들이 여성한시의 특성을 일반적으로 파악하고 평가하는데 ‘화장기(脂粉氣)’와 ‘부덕’이라는 단어를 사용한다. 전자는 여성적 말하기의 현실적 특성과 관계되어 있고, 후자는 이상적 여성의 말하기 방식과 관계된 것이다. 이 단어들은 여성적 말하기란 보편적 말하기와 다른 특수한 것이고, 특수한 것이어야 함을 강조하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규정의 이면에는 보편적 인성과 구분되는 특수한 인성으로서의 여성편성론(女性偏性論)이 있다. 이렇게 규정된 ‘여성적 말하기’란 대체로 온순하고, 부드러우며, 靜的이고 감각적이며, 내용적으로는 私的이고 사회적 타자로서의 말하기로 요약된다. 이러한 ‘여성적 말하기’에 대한 규정은 결국 ‘여성적 말하기’의 주변성과 열등성에 대한 규정이기도 하다. 그러나 실제 여성한시작가들의 의식 수준이나 관심 범위는 유교적 규범에 의해 제한되었던 범위를 뛰어넘는 것이었고 실제 여성한시의 세계는 매우 광범위한 제재영역을 포괄한다. 허난설헌이나 이옥봉처럼 ‘처벌’받지 않고, 황진이의 경우처럼 스스로 사회적 처벌을 초월한 방외인으로 살지도 않기 위해서, 현실의 ‘여성적 상황’ 속에서 한시 창작을 계속하였던 여성한시작가들은 필연적으로 말하기 전략을 구사하게 된다. 그러한 언어적 전략은 남장하고 말하기, 규범으로 분식하기, 행간으로 말하기, 침묵으로 말하기, 혹은 적극적으로 이용하기 등으로 드러난다. 여성한시가 보이는 이런 말하기 전략은 비록 ‘약자의 언어적 특성’으로 지적되는 것들이나 이들 여성한시작가들이 처했던 ‘여성적 현실’을 고려한다면 그 가치는 매우 적극적인 것이 된다. 결국 이러한 언어적 전략 속에 숨은, 현실적 상황과 말하기 사이의 긴장관계가 오히려 이 시들을 생명력 있는 것으로 만드는 ‘시적 긴장’의 핵심요소라고 이해하게 된다.
본고에서는 신여성의 고백체 담론을 근대성의 문제와 연관시키면서 그 근대 극복의 논리와 의미를 살펴보았다. 남성 지식인들의 고백처가 근대의 제도를 반복하는데 반하여 신여성의 그것은 억압적인 제도에 대한 타자성을 포함하고 있음을 실증적 자료를 통하여 보여주고 있다. 당시 한국 신여성들은 ‘피식민자’이며 ‘여성’이라는 이중의 타자성을 지닌 존재였다. 물론 그들은 ‘피식민자’로서 타자성을 극복하지 못하고 항성 서구의 여성, 서구의 연애를 논리전개의 근거로 삼는다. 그러나 그 한계는 ‘성욕’과 ‘모성’이라는, 금기시되는 부분에 들어갈 때 사라져 버리고 만다. 이때 그들의 주장은 명징하고 체계적이라기보다는 감성적이고 불규칙하며 산만하기조차 하여 무책임하고 논리에 맞지 않는 것일지 모른다. 그러나 이 방식은 근대를 이끌어가는 확고한 ‘논리’를 침식해 들어가서 전복시키고 다양화시키는데 유효적절한 것이기도 하다.
이 글은 한국 여성 시의 전환기인 1970년대 중반부터 1980년대에 걸쳐 생산된 고정희, 최승자, 김혜순, 박서원의 ‘여성주의 시’ 텍스트들을 서구의 페미니즘 텍스트 생산 이론을 원용하여 살펴 본다. 과연 여성적 글쓰기의 특성은 무엇인가, 과연 여성만의 글쓰기의 특성은 있는가?를 탐색하기 의해 정신분석학적 기호학자이자 페미니스트인 줄리아 크리스테바의 텍스트 생산 이론과 일레인 식수, 이리가레이 등의 이론으로 한국 여성 시인들의 텍스트들을 읽고 아버지의 상징 질서들을 뒤흔들고 교란시키기 위한 언어적 장치들을 찾아 본다. 로고스 남근 중심주의인 아버지의 질서 즉 상징계를 교란시키려는 코라(khora) 에너지들은 단군 신화 이래 한국 여성의 주체성을 형성해온 젠더 의식을 해체하고 다양한 전략들을 통해 가부장적 담론들에 위험을 가한다. 한국 최초의 본격적 페미니스트이자 기독교 신앙인이었던 고정희는 과도한 의문문 사용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의 특성을 만들고 있으며 아버지의 로고스 중심주의적인 글, 즉 문어체의 말 보다는 어머니의 말, 즉 구어체의 말들이나 굿거리 리듬, 마당굿 형식들을 통해 시의 형식주의를 해체하고 있으며 남성 영웅의 역사인 his-tory에 대한 대항 담론으로서 여성사 her-story를 쓰기도 했다. 최승자의 경우 로고스중심주의가 인간 (여성, 혹은 남성) 주체를 형성하기 위해 필연적으로 추방해 버려야 하는 ‘비천한 것들(abjection)’의 귀환을 텍스트 안에 능동적으로 행함으로써 아버지의 질서안의 투명한 자아로 정립되는 자신을 부정하며 또한 그러한 경계선적 주체는 죽음 충동과 공격성, 육체 훼손 등의 가학작 이미지와 연관되어 있으며 수사학적으로 역설과 모순 어법, 애매모호성 등을 통해 근엄한 일신론의 아버지의 상징 질서를 흔든다. 김혜순의 경우 언어와 상상력의 속력을 통해 지상을 지배하는 아버지중심적인 질서로부터의 탈주를 보여주며 카니발적 블랙 유머를 생산함으로써 근엄한 아버지의 세계를 부정하고 조롱하면서 뛰어 넘기를 한다. 가장 기호계적 코라 에너지의 지배를 많이 받고 있는 박서원의 경우 초현실주의적인 환상의 흘러넘침을 통해 로고스중심주의를 부정하고 전복시킨다. 무의식의 에너지가 방출하는 상상력의 도약은 운동적인 리듬이나 반복되는 소리 패턴들을 통해 언어 유희의 희열을 생산한다. 여성적 글쓰기의 가장 특징적 요소로 의문문, 운동성, 리듬 감각, 이질혼성적 모순성, 애매모호, 다의성, 패로디, 아이러니, 블랙 유머 등이 드러났으며 그것은 ‘타자’로서의 젠더 의식을 부수고 아버지의 상징적 질서를 교란하고자 하는 한국 여성주의 시인들의 처절한 욕망을 드러내는 전략적 장치로 보인다.
이 글은 박정애의 「에덴의 서쪽」(『문학사상』 1998년 7, 8, 9월호 분재)을 대상으로 1990년대 여성작가들이 현재 여성억압의 기제로 작용하는 가부장제와 자본주의에 대해 어떤 대항담론을 생산해 내고 있는지, 또 그들이 생산한 대항담론의 성과와 한계를 살펴보려는 의도에서 씌어졌다. 이 텍스트의 특성은 의도적인 대항담론이라는 것이다. 서술의 동기가 반여성주의적 여성 주체였던 화자가 출산을 계기로 여성주의적 주체로 다시 태어나면서 그 동안 역사의 배경에 머물렀던 여자들의 역사를 쓰기 위해서이다. 이런 목적을 위해 텍스트는 몇 가지 서술전략을 사용한다. 전략의 하나는 ‘두 입술이 하는 이야기’이다. 이것은 어머니와 딸이 하나가 되어 하는 이야기로, 이 텍스트의 어머니와 딸만이 아니라 상이한 주체성을 지닌 모든 여성 개인은 윗(혹은 아랫) 입술이고, 여성과 여성의 연대는 입술이라고 해석할 수 있다. 여기에서 들이면서 하나라는 특징은 여성 섹슈얼리티의 특징이면서 ‘우리’가 지향해 나아가야 할 사회의 특징이기도 하다. 다른 한 전략은 가부장제를 공고하게 유지하는데 기여해 온 기독교 신화를 패로디하는 것이다. 새로운 유토피아의 특성은 첫째 모성 원리의 존중이다. 이때 모성은 남성 중심의 혼인제도에서 발현되는 것이 아니라 그 제도에서 벗어나 생명 자체의 귀중함을 깨닫고 실천하는 생명 존중의 원리이다. 둘째는 여성 섹슈얼리티의 추구이다. 이 텍스트에서는 여성의 성적 쾌락, 여성간의 연대, 레즈비아니즘이 담론화되었다. 셋째, 여성의 경제적 주체성이다. 그러나 이 텍스트에서 이 부분은 취약하다. 새로운 유토피아의 특성인 이 세 가지는 이 텍스트만이 아니라 90년대 생산된 여성 작가들의 대항담론의 특성이다. 여성의 주체성과 관련시켜 모성과 섹슈얼리티에 대한 담론은 무성하지만 모성과 섹슈얼리티의 주체성을 위해서도 더욱 치열하게 논의되어야 할 경제적 주체성과 관련된 문학적 담론은 찾아보기가 어려운 실정이다. 유토피아를 꿈꾸기만 하는 게 아니라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경제적 주체성에 대한 치열한 인식과 그 인식을 바탕에 둔 구체적이고 생생한 문학적 담론이 더욱 필요한 시점이다.
본고는 남평曺氏의 『丙子日記』를 대상으로 역사에서 배제된 여성담론을 공적 영역에 편입시키고 여성서사체의 여성적 문학성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작자와 연대가 분명하고 私家의 가보로 전해온 17세기 여성일기인 『丙子日記』가 남성일기였으면 350여 년간이나 공개를 미루었겠는가. 역사적 담론을 논의함에 있어 소위 정전이 아니라는 이유로 연구자들로부터 소외된 여성텍스트에 대해 온당한 평가가 있을 때 역사의 총체성을 얘기할 수 있다고 본다. 게다가 『丙子日記』는 제목이 병자호란(1636년)을 상기시키는 것도 그렇고 전란의 와중에서 남평曺氏가 피난지를 전전하며 몸소 겪은 전쟁체험기인 점에서 단순한 규방일기가 아니다. 전쟁은 안채에 머물러야 할 사대부집 여성을 ‘바깥세계’로 내몰아 젠더공간의 확대를 가져왔고 결과적으로 역사의 현장에 참여하도록 했기 때문이다. 물론 『丙子日記』의 작자는 여전히 유교적 가부장사회의 영향 아래 남성의 섀도우(shadow)인 ‘남성이 만든 여성’의 삶으로 복귀하고 있다. 하지만 여성서사체로서 『丙子日記』는 개인적/시대적 상처의 진술이되, 대부분의 내간체들이 억압적 현실에 대한 푸념이나 하소연의 언술인 것에 비해 그런 측면이 없는 건 아니나, 사실에 치중한 기록성과 간결하고 격조있는 한글표기 문장으로 역사의 구체적 일상성을 획득하고 있는 작품이다.
본 논문은 연애소설이 대중 독자들에게 널리 공감대를 형성하는 문학 장르인 데도 불구하고 리얼리즘 소설과 다른 방식을 추구한다는 이유로 문학 연구에서 소외되었다는 점에 대한 문제 의식에서 출발한다. 연애소설이 그 동안 문학 연구에서 소외되었던 원인은 바로 현실에 대해 치열한 대응 방식이 아닌 의사 초월적인 방식으로 대응하고 있음에 대한 비판에서 비롯된 것이다. 그러나 치열한 현실 대응 방식만을 고집하는 것은 소설의 다양성을 인정하지 않고 오로지 리얼리즘이라는 하나의 잣대로 평가하려는 경직된 태도가 아닐 수 없다. 이러한 잣대로 연애소설을 분석할 경우 ‘통속적이다’ 외에는 더 이상 어떤 의미도 발견하지 못하는 한계점을 갖는다. 「찔레꽃」은 타락한 가치가 통용되는 일제 하 근대 사회에서 사랑이란 현실적으로 실현 불가능한 것이며 오로지 현실을 초월할 때에만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진정한 사랑을 추구하는 여성인물의 도덕적 미덕을 통하여 권력과 돈과 명예를 기반으로 삼아 저급한 성적 욕망과 타락한 물신주의를 추종하는 남성을 비판하고 있다. 여성의 도덕적 숭고함은 곧 정신적 가치인 사랑마저도 돈의 교환가치에 의해 지배되는 자본주의 사회 현상에 대한 비판의 척도가 되며 아울러 이러한 현실의 질서로부터 벗어나고자 하는 욕구의 또 다른 표현임을 확일할 수 있다. 독자들은 연애소설을 읽음으로 해서 일상 생활에서는 배출구를 찾을 수 없는 억눌린 감정을 분출할 수 있고, 나아가 구속적인 현실에서 벗어나 구원받고 있는 듯한 느낌을 받고, 이상에 접근해 있는 듯한 초월적인 위안을 받게 된다. 그러므로 연애소설은 현실에서 왜소해진 대중 독자들을 위로하거나 도덕적으로 보상하여 주고 현실에서 소외된 독자들의 소외감이나 불안의식을 위로해 주는 기능을 담당한다.
『토지』가 당대의 일상적 구체적 세부사항을 통해서 총체적 현실을 목표로 한다면, 『혼불』은 정서적 극대화를 통해 인간에 대한 새로운 이해에 도달하게 한다. 각 작품은 서사적 목표가 다르다. 서사적 목표가 다르기 때문에 서사적 전개 또한 다를 수밖에 없다. 『토지』가 사건과 사건을 잇는 서사 본령의 전개방식을 채택했다고 한다면, 『혼불』은 주제를 세가지 전개를 통해서 제시한다. 사건과 사건을 잇는 서사를 통해서 주제를 전달하기도 하지만, 반복된 이미지와 청명한 언어, 역사적 예화, 관습, 재례를 통해서 똑같이 주제를 반복적으로 제시한다. 두 작품의 주제를 형성하는 『토지』의 ‘생명사상’이나 『혼불』의식은 둘 다 인간의 존엄성의 문제와 관련이 있다. 즉 존재를 존재답게 하는 힘, 생명과 영혼을 그답게 하는 정신의 정수, 핵으로 인간이 인간이고자 하는 인간다움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나 두 작가의 현실을 인식하는 방식이 다르기 때문에 작품에 드러나는 양상은 판이하다. 『토지』에서는 인간의 존엄성을 지킬 수 없게 하는 것은 폭압적인 현실로 드러난다. 그러나 『혼불』에서는 세계의 폭압에 의해서 당하게 되는 고통과 상심, 아픔이 오히려 자신을 새롭게 세우는, 혹은 자신을 비우는 새로운 힘으로 작용한다. 이러한 현실인식 방법은 인물을 형상화하는데도 다르게 나타난다. 『토지』의 윤씨부인이나 『혼불』의 청암부인은 다같이 청상의 과부지만, 『토지』의 작가는 폭압적인 현실로 인해 고통받는 인간적인 고뇌에 찬 윤씨부인을 부각시키려고 했는가 하면, 『혼불』의 작가는 청암부인을 통해서 청상의 운명을 인내를 통해서 극복하는 인간 승리의 모습을 부각시키려는 의도를 가지고 있다고 할 수 있다. 『토지』의 작가가 자신의 恨 내지 업보를 타고난 인간들의 부조리한 삶의 모습들을 서술적 의도로 잡았다고 하면, 『혼불』의 작가는 인간들의 내면적 인내를 통하여 자신이 가지고 태어난, 恨을 어떻게 극복하는가 하는 서술적 의도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990년대 문학을 대표하는 작품들은 대개 대중에게로 다가섬이 그 어느 때보다 두드러졌다는 것과, 지극히 개인적인 문제들이 주요 소재로 떠올랐다는 점, 王 노골적인 자기노출의 일반화를 특징으로 지닌다고 할 수 있겠다. 1990년대 문학은 물질적 풍요에 반비례하여 나타난 정신의 빈곤과, 이렇다할 사회적 이슈와 고수할 만한 이데올로기를 찾지 못한 세대들의 비사회적 특성을 여지없이 보여주었다. 이러한 비사회적 특성은 곧 개인들의 내면으로의 침잠으로 이어지고, 그것의 결과는 여러 세기말적 특성을 배태시키는데, 이런 문단의 성향을 대표하면서도 상이한 모습을 보여 주는 이가 바로 신경숙이다. 앞의 두 가지를 대표하면서도, 뒤의 자기노출에 있어서는 다른 모습을 보여준다는 점이 바로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이런 점에 유념하면서, 「풍금이 있던 자리」, 「베드민턴 치는 여자」, 「깊은 슬픔」, 「외딴방」에서 발견되는 조심스럽고 수줍게 드러난 내면을, 결핍과 부재성의 측면에서 조망하였다. 신경숙 소설 속에 드러난 부재성은, 이루어질 수 없는 불임의 사랑, 물질과 정신의 빈곤, 외로움과 절망으로 요약될 수 있다. 이러한 아픔과 상처로 점철된 현실 속에서 갖는, 신경숙 특유의 몸짓과 자세를 작품 속에서 살펴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