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한국현대사에서 1980년대는 자유와 평등에 대한 열망과 민주화 의식이 비약적으로 성장한 시기였으며 어느 정도 제도적 장치를 마련한 시기이기도 하다. 그러나 인류 역사상 가장 오래된 지배이데올로기인 가부장제와 운동권 내에서도 만연했던 남성중심성은 혁명의 깃발 아래서도 공고하게 유지되었다. 또한 80년대 지성의 흐름을 주도했던 저항담론들조차 계급 갈등을 우선시하고 젠더의 문제는 부차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본고에서는 젠더정치학의 관점에서 후일담 소설을 논한다. 시위현장과 토론장과 산업현장과 감옥에서 분명 존재했던 여성인물들이 남성작가의 후일담 소설에서 삭제되거나 왜곡되어 묘사되었음은 이미 선행연구들에서 논의된 바 있으며, 본고에서는 후일담 소설의 보다 다양한 젠더 지평을 분석한다. 80년대에서 조금 거리를 둔 시점인 2000년에 발표된 황석영의 장편 『오래된 정원』의 사유의 시발점은 80년 5월 광주였으나 이 소설은 20세기 전반에 걸친 남성중심 근대성의 폭력성을 반성하고 21세기의 가치를 ‘자연’으로 상정된 ‘여성성’에서 찾으려 한다. ‘남성성’을 부정하고 ‘여성성’을 지향하는 이 소설은 사실상 전통적인 젠더 이분법에 고착되어 있다는 한계를 가지며 실제로 80년대에 분투했던 다양한 여성들을 하나의 이미지로 환원해버린다. 그 하나의 이미지는 남성판타지의 일종인 엘렉트라 콤플렉스에 지나치게 경도된 여성이며, 독재 권력의 폭력에 저항했으나 그 자신도 ‘남성’이라는 기득권을 놓지 않았던 이율배반적인 남성인물을 이해하고 사랑하고 포용하는 여성상의 이미지이다. 모성에 대한 집착 역시 ‘모성’ 또한 이데올로기임을 간과하고 있다. 한편 후일담 소설 연구에서 가장 많이 거론되는 작가인 공지영의 소설들에서 후일담의 서사구조는 변주되어 반복된다. 80년대는 혁명에 대한 낭만적 낙관과 인간에 대한 예의와 동료에 대한 신뢰가 가득했던 시기였고 그 시대의 가치는 여전히 유효하다는 것이 공지영 텍스트의 서술태도이다. 또한 시대가 바뀌면서 많은 남성들이 비겁함과 안일함과 자조와 타협하거나 일부 남성들이 제도권 정치권력에 편입했을 때 끝까지 현장에서 이름 없는 시민 활동가로 자리를 지킨 여성들을 증언한다. 노동현장에서 빈곤과 질병과 싸우며 마지막까지 신념을 굽히지 않고 동지들에게 헌신했던 여성인물을 형상화 한 공지영의 서사는 계급과 젠더 문제를 다 담으려 했다. 이는 공지영이, 계급과 이념에만 집중했던 황석영과 달라지는 지점이다. 남성들의 역사에서 삭제되거나 왜곡된 여성의 목소리를 복원했다는 의의를 가지지만, ‘감성’을 ‘여성적인 것’으로 상정하고 ‘여성적’인 ‘감상성’이 혁명과 가까운 것으로 묘사하는 공지영의 텍스트 역시 젠더 이분법에서 자유롭지 않다. 비겁하고 나약하며 때로 폭력적인 남성인물들을 연민하고 포용하는 여성인물들의 인물형상화가 변주되어 반복되는 것도 그러하다. 다른 한편, 80년 5월 광주를 묘사한 중편 「저기 소리 없이 한 점 꽃잎이 지고」(1988)를 발표하면서 작품 활동을 시작한 최윤의 텍스트는 다른 후일담 서사와는 확연하게 다른 서술기법으로 그 시대를 형상화 한다. 시적이고 암시적인 서술방식과 분열증적 인물화는 그 시대의 폭력을 더 비극적으로 느끼게 하는 수사적 효과를 가지며 국가의 폭력과 개인의 폭력, ‘남성성’과 폭력에 대한 중층적인 사유까지 나아간다. 전형적인 후일담 서사구조를 가지는 「회색 눈사람」(1992)은 차갑게 승화된 지적인 서술태도도 돋보이지만, 삭제된 여성들의 이야기를, 자기연민이나 감상성을 제거한 채 복원했다는 의미에 더해서 여성들의 우정과 사랑 그리고 연대감을 혁명과 연결시키는 현대성과 진보성을 보인다. 무엇보다 후일담 소설의 보다 다양하고 폭넓은 젠더 지평을 펼쳤다는 의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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