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여성주의적 관점에서 문학사를 다시 쓰는 일이 더 이상 새롭지만은 않은 이 시점에도, 여성주의적 관점에서의 희곡사나 연극사를 접하기란 여전히 흔치 않은 일이다. 이는 이 장르 자체의 상대적 열세 때문이기도 하고, 다른 장르에 비해 연출과 무대화 과정을 통한 실제 작업을 수반해야 하는 특성과 관련하여 현실적으로 여성의 목소리를 내기 힘든 상황 때문이기도 하다. 물론 미약하나마 일제 시대부터 현재에 이르는 여성희곡사의 맥락을 잡아낼 수는 있다. 나혜석, 박화성, 장덕조 등 일제시대 여성 작가의 희곡에서는 식민지의 억압과 가부장제의 억압에 시달리는 여성의 현실이 드러난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여성희곡에 대해 말할 수 있게 된 시기는 1950년대 이후 60-70년대에 일정한 여성희곡 작가군이 형성되면서이다. 그 중에서도 박현숙과 김자림이 특히 눈길을 끈다. 박현숙 희곡에서는 여성의 모성성과 도덕적 책임에 대한 관심이 연계되는가 하면, 김자림 희곡에서는 억제된 성으로부터 탈출하며 주위 환경에 도전하려는 여성상이 등장하기도 한다. 하지만 더욱 적극적인 의미에서의 여성연극이 등장하는 것은 여성주의에 대한 이론적 관심이 고조되던 80년대 이후의 일이다. 그런데 이 시기 여성연극은 외국 원작의 번역극이나 번안극, 타 장르의 각색극, 운동성이 강한 단체의 공동창작물들을 다수 포함하고 있어, 막상 텍스트로서의 희곡 창작 중심으로 여성극작가의 존재를 강조하기란 여전히 쉽지 않다. 이와 같은 배경 속에서, 실질적으로 한국연극에 나타난 여성육체 이미지의 문제는, 우선 여성을 소재로 다룬 남성 희곡작가나 남성 연출가의 작업을 통해 다가가야 할 문제로 파악된다. 이현화 희곡 「카덴자」는, 희곡 자체의 상황도 여성 연기자의 육체를 중심으로 설정되어 있는 데 다 실제 공연에 있어선 그 효과가 더욱 증폭되어 나타나는 두드러진 예로서, 이 문제에 접근해가는 하나의 중요한 대표 사례가 되어줄 수 있다. 「카덴자」는 우선 표면적으로 세조와 사육신의 소재를 다룬 역사물과 같은 첫인상을 풍기나, 사실 그 상황 속에 예정된 ‘임의의 여관객’을 끌어들여 고문을 가하는 과정만으로 채워진 작품이다. 이 작품은 기본적으로 육체의 이미지를 부각시키기 쉬운 위협적이고 압도적인 배경과 분위기 위에 구축되어 있다. 그 안에서 여성 육체는 고문의 점층적 효과를 통해 유린당하는 이미지로 드러난다. 특히 가상의 고문에서 실제 고문으로 진전되어 가는 중에, 실질적인 육체의 고통 못지 않게 성희롱적 모멸감을 불러일으키는 데 적절한 가해 행위들이 자주 드러난다. 궁극적으로 이 작품의 특성은 의미의 애매성과 감각의 확실성으로 귀결된다. 주인공 여성이 정치적 폭력에 의한 또 하나의 무고한 희생자로 제시되었는지, 당대 현실에 무심한 일반 관객을 질타하기 위한 대표적 방관자의 예로 선택되었는지는 분명치 않다. 하지만 해석상의 다의성은 접어두고, 이 공연이 여성의 육체를 활용하여 강력한 고통의 감각을 전달하는 것만은 분명하다. 만일 이러한 여성 육체의 이미지가 많은(특히 남성) 관객들에게 작품의 의미와는 무관한 쾌락의 시선을 허용한다면, 이는 신중히 재고되어야 할 문제이다. 이 작품 외에도 최근 적지 않은 수준급 공연에서 연기자의 노출 빈도가 높아지고 있는 실정이기에, 이 문제의식은 계속 유효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