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문학사에서 2세대 신여성 작가 혹은 동반자 작가로 인식되어 온 소영 박화성(1903~1988)은 1925년부터 1985년까지 17편의 장편소설과 66편의 중·단편소설을 창작하였다. 이러한 박화성의 문학이 충분히 주목되지 못한 것은 일제 강점기 문학에 비해 해방 이후의 성과가 그에 미치지 못한다는 인식에서 비롯된 바가 크다. 박화성은 1938년부터 해방 전까지 절필했으나 이 시기는 공백기가 아니라, 박화성 문학 전후반부의 의미를 연속적인 시각에서 규명할 수 있는 단서가된다. 일제 말기부터 해방기를 거쳐 한국전쟁에 이르는 시기 박화성의 문학은 전반부와 후반부를 연결하면서 변화의 가능성을 잠재하고 있기 때문이다. 본고에서는 해방기를 전후한 박화성의 행적과 문단 상황을 연계하여 논의하면서 절필했던 시기에 ‘목포’를 중심으로 이루어진 박화성의 문학 활동을 조명하고자 한다. 지역문인들과의 네트워크에 주목함으로써 사상운동을 위한 활동이아니라 문학인으로서의 정체성을 지속해나가고자 했던 박화성의 작가의식을 이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해방 후 박화성은 전향하지 않고 목포의 문인들과 교류하며 문학 활동을 재개하였고 좌익 탄압이 강화되던 1947년 조선문학가동맹 목포지부장으로 추대되었다. 한편, 이광수의 추천을 받은 「추석전야」(1925)로 등단하면서 시작된 민족주의 진영 문인들과의 교류도 해방 후에 계속되었고 이는 목포 문인 네트워크와 병행되면서 박화성 문학의 특수한 입지를 가능케 했다. 그 중심이 된 목포라는 장소는 박화성의 존재로 인해 서울을 중심으로 한 민족주의 진영의 문인들과다양한 사상을 기반으로 한 지역 문인들과의 네트워크가 겹치는 곳으로서 해방기 문학의 특수한 사례를 보여준다. 지역 문인이자 여성작가였던 박화성의 활동은 민족문학 담론을 주도하고자 했던 좌우익문단 어느 한 쪽에 속하지 않으면서, 여성을 비롯한 하위주체를 건국의 주체로 포함하는 해방기 문학의 한 면모로 이어진다는 점에서 새롭게 평가할 필요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