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한국 문학은 ‘애도의 내셔널리즘’에 맞서 망각의 블랙홀에 빠져 버린 이들의 흔적을 찾아 지배적 기억에 균열을 내는 ‘기억 정치’의 면모를 보여 왔다. 그러나 ‘소수자’의 기억 투쟁이 이루어지는 가운데에서도 여성들이 겪은 전쟁은 ‘공적인 애도’의 대상이 되지 못했다. 여성이 겪은 전쟁이 공론화되지 못한 것은 여성의 ‘이방인(異邦人)성’과 관련성이 깊다. 전시 하에서 여성은 적군 병사의 성적 착취나 폭력에 노출되어 있고, 생명의 사제가 아니라 사람을 죽이는 병사를 키워 내고, 때로 자신의 민족이 증오하는 적군의 아이를 낳아 길러야 하는 모순 속에 놓인다. 그러나 해방과 전쟁을 거치면서 수혜국과 원조국 사이에 성적 수혜 관계가 형성됨으로써 한국의 민족주의가 강력한 가부장성을 함축하게 되었기 때문이다. 한국 전쟁이 여성의 삶에 남긴 상흔에 대한 기억과 애도 작업은 박완서의 등장으로 가능해졌다. 그녀의 데뷔작(『나목』)에는 고귀한 이들은 떠나고 그들 대신 살아남았다는 자기 비난에 시달리는 딸(여성)의 수치심이 깔려 있다. 그러나 그녀는 좌익이었던 오빠의 죽음에 대한 기억의 거듭된 수정과 복원의 작업을 통해 ‘애도의 금지’라는 국가법에 맞서 시민의 정의를 일깨우는 한국의 ‘안티고네’가 되었다. 그러나 그녀가 전쟁의 이야기를 반복적으로 쓸 수밖에 없었던 것은 여전히 구조되지 못한 채 물 속 깊이 “가라앉은 자들”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이들이 바로 가부장적 민족 국가의 전쟁 기억 속에서 빗금쳐지거나 지워진 성폭력 피해자나 “양공주”이다. 박완서는 이들 여성 ‘하위 주체(subalten)’들을 자신의 문학적 공간 속으로 초대해 말할 수 있는 자의 위치를 부여한다. 그녀는 가부장적 민족주의 공동체가 삼켜 버린 여성들의 흔적을 찾고, 살아남은 자에게 이들에 대한 기억과 애도의 의무를 지운다.
박완서, 「그 가을의 사흘동안」, 『엄마의 말뚝』, 세계사, 1994.
박완서, 『그 산은 정말 거기 있었을까』, 웅진출판, 1995.
박완서, 『그 남자네 집』, 현대문학, 2004.
박완서, 『박완서-문학의 뿌리를 말하다』, 서울대학교 출판문화원, 2011.
김양선, 「복원과 복수의 네버엔딩 스토리」, 『경계에 선 여성문학』, 역락, 2009, 121쪽.
박경리, 「재귀열(再歸熱)」, 『박경리문학전집 10: 환상의 시기』, 지식산업사, 1987, 237쪽.
이영진, 「이승만 정부 초기 애도-원호정치」, 『애도의 정치학: 근현대 동아시아의 죽음과 기억』, 이영진 외, 도서출판 길, 2017, 165, 245쪽.
이재경·윤택림·조영주 외, 『여성(들)이 기억하는 전쟁과 분단』, 아르케, 2013, 17쪽.
한국여성민우회 엮음, 『거리에 선 페미니즘 - 여성 혐오를 멈추기 위한 8시간, 28800초의 기록』, 궁리, 2016, 200쪽.
베네딕트 앤더슨, 윤형숙 역, 『상상의 공동체』, 나남출판, 1991, 19~63쪽.
우에노 치즈코, 『여성 혐오를 혐오한다』, 나일등 역,은행나무, 2012, 51쪽.
와카쿠와 미도리, 김원식 역, 『전쟁과 젠더: 사람은 왜 전쟁을 하는가』, 알마, 2005, 201쪽.
일레인 H. 김·최정무, 박은미 역, 『위험한 여성』, 삼인, 2001, 27~28쪽, 56쪽, 188쪽.
프리모 레비, 이소영 역,『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 돌베개, 2014, 87~90쪽.
하야시 히로후미, 박해순 역, 「한국에서의 미군의 성 관리와 성폭력: 군정기 부터 1950년대」, 『군대와 성폭력』, 송연옥·김영 외, 선인, 2012, 251~282쪽.
김애령, 「다른 목소리 듣기: 말하는 주체와 들리지 않는 이방성」, 『한국여성철학』 17, 한국여성철학학회, 2012, 35~60쪽.
김은하, 「탈식민화의 신성한 사명과 '양공주'의 섹슈얼리티」, 『여성문학연구』 10, 한국여성문학학회, 2003, 159~179쪽.
김준현, 「한국전쟁의 발발과 미군 관련 풍속에 대한 대중 인식 변화」, 『한국민족문화』 59,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16, 41~68쪽.
서정자, 「박화성의 해방 후 소설과 역사의식」, 『현대소설연구』 24, 한국현대소설학회, 2004, 49~72쪽.
서정자, 「박화성 소설에 나타난 기독교의식 어떻게 볼 것인가」, 『숙명문학』 2, 숙명문학인회, 2013, 206~229쪽.
손희정, 「관계성을 드러내는 사건, <자 이제 댄스타임>」, 『여/성이론』 31, 여성문화이론연구소, 2014, 238~25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