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나무’는 원형적으로 끊임없이 허여하는 수동적인 몸을 상징하는 동시에, 무한한 생멸과 순환을 거듭하는 생명력을 지닌 세계수로 신성시되어 왔다. 그런데 여성주의 자장 안에서 읽어보는 나무에 관한 상상력은 매우 다르다. 여성의 몸 안에 나무가 형해되어 있거나 육화되어 있는 여성시에서, 나무는 오히려 어떤 다른 것에 의해서도 길들여지지 않으려는 의지적인 몸을 역설적으로 드러내고 있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김혜순, 나희덕, 황인숙, 세 시인의 시를 중심으로 길들여지지 않는 나무들로 일관된 여성시의 궤적을 살펴보았다. 김혜순은 ‘나무’를 통해 사유하는 대표적인 시인이다. 그는 남성중심의 신화적 세계관 위에서 신성시되어 온 나무를 뒤집는 전복적인 나무로 여성의 몸을 표현한다. 여성의 몸을 싱싱한 나무와 더불은 ‘환한 대걸레’로 표현해 나무의 생장과 여성의 일상적 노동을 축제의 장으로 만들며, 이런 온전한 나무의 몸을 이루기 위해 ‘아버지’적 세계관의 흔적을 적극 거부할 뿐 아니라, 흰 나무와 ‘희디흰 편지지’의 육체성을 통해 여성적 글쓰기의 욕망까지 체현한다. 나희덕의 시에서 나무는 생태적 친연성과 대지적 모성성을 넘어서 자기 내면의 타자들을 비유한다. 자기 안에 내재한 길들여진 자아에 길항하는 자존적 자아, 여러 겹의 욕망을 지닌 채지병같은 몸살을 앓는 섬세한 자아들이 모두 나무로 표현된다. 시인은 이런 나무들로 가득한 ‘잡목숲’의 눈부심을 마침내 자기 내면에서 발견하고, 자신의 ‘밝은 피’에 뿌리내린 나무들과 한 몸으로 즐겁게 몸을 떨며 자기 안의 타자성을 적극 끌어안는다. 황인숙의 나무는 마법에서 풀려나 밤바람 속을 내달리는, 그리고 그것이 즐거워 ‘진저리’치는 나무들이다. 시인은 욕망이 무거운 만큼 오히려 가볍게 날아오르길 희구하면서, 살아있음을 생생하게 느끼는 순간 나무들과 함께 광기의 바람 속으로 유쾌하게 뛰어든다. 싱싱하고 건장한 나무를 ‘훨씬’ 껴안아 그 심장 박동대로 온몸을 젖혀 흔드는 이 시인에게 있어 숨가쁜 질주는 곧 ‘나무의 몸을 통해 나온 욕망’들이다. 이같이 세 시인은 환한 광기의 나무, 밝은 피에 뿌리내린 나무, 질주하는 유쾌한 나무 등을 통해 여성의 몸과 욕망을 표현하고 있다. 그리스 신화에도 자신의 의지대로 나무로 몸바꾼 여성들의 이야기가 자주 등장하듯, 길들여지기를 거부하면서 나무가 되는 여성들의 이야기는 여성시에 있어서 의미있는 주제라 할 수 있다. 적극적으로 나무가 되길 서슴치 않은 여성들의 몸에 흐르는 수액은 그 무엇에도 길들여지지 않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의 젖줄과도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