ISSN : 1229-4632
2019년 이전의 한국 사회에서 임신중지는 법적으로 명백히 금지되어 있으나 현실에서는 암묵적으로 허용되어 왔다. 형법이 규정하는 법적 처벌의 대상이지만누구나 어렵지 않게 임신중지를 할 수 있는 이런 상황은 아이러니하게도 우리 사회에서 임신중지가 충분히 사유되지 못하게 하는 결과를 낳았다. 임신중지 담론의 빈곤은 문학장 안에서도 예외가 아니어서 임신중지 서사 및 임신중지 서사에관한 본격적 연구가 협소한 실정이다. 그런데 2019년 헌법재판소의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한국 문학장 안에서 새로운 임신중지 서사가 점차 발견되기 시작한다. 이에 본고는 2019년 낙태죄 헌법불합치 판결 이후 발표된 이현석의 「다른 세계에서도」(2019), 하명희의 「십일월이 오면」(2021), 박서련의 「그 소설」(2021), 이서수의 「엉킨 소매」 (2022)를 중심으로 최근 한국 소설의 임신중지 재현 양상을 살피고자 한다. 특히최근의 서사가 ‘임신중지 감정 각본’에 새겨 넣는 균열들에 주목하고자 한다. 감정 각본이란 한 사회의 ‘상식적인 감정’을 규정하는 일관된 내러티브로, 우리 사회의 임신중지 감정 각본에는 슬픔·죄책감·수치심 등의 부정적 감정만이 허용되어 왔다. 그러나 에리카 밀러가 강조하는 것처럼 어떤 임신중지는 안도·감사·희망 등의 긍정적 감정을 야기하기도 한다. 우리 사회의 임신중지 감정 각본이 가진 편협함은 임신중지와 행복을 함께 사유하는 누군가의 목소리를 비윤리적인것으로 일축할 위험이 있다는 점에서 재고되어야 한다. 본 논문은 임신중지를 다루는 네 편의 근작과 에리카 밀러의 논의를 함께 살핌으로써 최근 우리 소설들이보여주는 임신중지 서사의 감정 각본 다각화 시도를 확인해 보고자 한다.